영웅들의 선택 : 시마바라의 난, 아마쿠사 시로 vs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영상문화생활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잇키, 막말 이전 최후의 본격적 내전.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




그렇게 재밌는 편은 아니었는데, 모조리 번역해봄.
영상 틀어놓고 주르르 받아쓰기 하다보니까 도중부터 뭔 짓 하는가 싶더라 ㅋㅋㅋ


그래도 걍 한거 끝까지 다해봄.
지난번에 중간중간 생략하면서 했던 콘도 이사미(이케다야 사건),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편과는 달리 전부 ㅎㅎ
영상에 나오는 말 모조리 텍스트로 옮겨봤다. 




방영편들 중에서는 선택지가 크게 대비되고,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편들이 재밌음.
근데 얼마 전에 방영했던 쇼와의 선택 2편 요시다 시게루 일본독립의 고투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선택지가 크게 재미는 없더라.



솔까 아마쿠사 시로 얘네들도 뭔 선택지(1.국내 키리시탄의 원군 / 2. 외국의 원군)를 고르든 간에 살아날 가망은 없음.
뭐 딱히 그렇게 멀리를 내다보고 철저한 계획 끝에 일어난 반란도 아니라...
두 선택지가 별 크게 의미도 없고. 실현 가능성도 떨어짐.



오히려, 마츠다이라 노부츠나의 고뇌가 재밌다.
그냥 단순히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삼기 위해, 천주쟁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은 쉽지만.
그리고 그렇게 하는 편이 제일이지만.
가능하다면 어떻게 최대한 키리시탄 이외의 농민들의 목숨을 살리면서 반란을 잘 수습할수 있을까. 지혜 이즈의 실력이 시험당할 때.



이하, NHK BS 프리미엄 영웅들의 선택.
격돌! 시마바라의 난 아마쿠사 시로 vs.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9월 11일 방영분)









英雄たちの選択 島原の乱 天草四郎vs松平信綱








원화원년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

전국시대의 끝을 고했던 오사카 여름 전투. 도쿠가와가에 의한 천하태평의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불과 22년 후, 에도막부의 기둥을 흔드는 대사건이 큐슈에서 일어났다.
시마바라, 아마쿠사 지방에서 반란의 불꽃이 일어난 것이다.
영주의 가혹한 압정. 거듭되는 키리시탄 박해로 인해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일어선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시마바라의 난이다.

대략 3만 7천명이라고 일컫어지는 잇키세력을 이끌었던 것은 16세의 소년, 신의 아이라고 불렸던 아마쿠사 시로.








이를 진압하는 막부군 12만의 총대장은 로쥬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지혜 이즈라고 불렸던 남자이다.
노부츠나를 나타내는 말이 남겨져 있다.


'노부츠나와 지혜를 겨루어서는 안된다. 그 자는「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앙경록(仰景錄)>









전란의 무대가 된 하라 성. 시로와 노부츠나. 두사람 리더의 싸움은 역사상의 대격전이 되었다.
근년의 발굴조사로 인해 시마바라의 난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이 밝혀졌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통설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일본 국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큐슈대학대학원 교수 핫토리 히데오(服部英雄) : (시마바라의 난은) 일개 지역의 반란이 아니었다.
역시 전일본적인, 세계에 파급을 줄 위기적인 요소를 가진 사건이라고 막부는 판단했던게 아니었을까.







격렬한 공방전의 뒤에는 두사람의 목숨을 건 선택이 있었다.

아마쿠사 시로의 선택. 박해를 받고, 지하로 숨어든 전국의 기리시단에게 궐기를 요청할까.(1. 키리시탄의 원군)
아니면, 외국의 힘에 기댈것인가. (2. 외국의 원군)

그리고 공격하는 노부츠나의 갈등.

이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희생을 무릅쓰고 힘으로 공격할 것인가. (1.강공책)
교섭으로 인한 회유책을 취할 것인가. (2.회유책)
판단을 잘못하면, 반란의 불씨가 전국에 퍼질지도 모른다.



아마쿠사 시로 : 이 농성전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반란을 종결시키겠다.




그런 두 사람의 마음 속을 여러분야의 전문가들(철학자, 뇌과학자, 성곽고고학자, 국제분쟁조정관)이 다각적으로 파헤쳐본다.

철학 : 정치권력에 있어 종교의 무서움은 (종교는) 내세까지 약속한다는 것.
뇌과학 : 아마쿠사 시로는 진게 아니었을지도.
성곽 : 잇키군 vs. 막부군이 아니라 유럽 vs. 일본의 싸움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 시대를 크게 바꾼 두 리더의 결단을 살펴보자.


















격돌! 시마바라의 난. 아마쿠사 시로 vs.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역사의 터닝포인트에서 영웅들에게 닥친 선택. 그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고민하며 하나의 선택을 했을까요.
이번에는 에도시대 초기 큐슈의 시마바라, 아마쿠사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민중반란.
시마바라의 난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번의 주인공은 두 사람의 리더입니다.
잇키군의 리더. 아마쿠사 시로 (1623?~1638)와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파견된 막부군의 총대장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1596~1662)
이 두 사람입니다.







이소다 미치후미
(시즈오카 문화 예술대학 교수, 주요저서「무사의 가계부」,「무아의 일본인」등)

이소다 : 이 사건은 지역적 반란이라는 이미지가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 이는 규모로 봐도 당시의 무사가 상처입은 사상자수로만 봐도 지역반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막부의 기둥을 흔들었다고 말해도 될 대사건이었다. 나는 이를 일본최후의 종교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주셨습니다.

센다씨는 이 하라성의 발굴조사에도 참가하셨다고 하는데, 그 발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센다 요시히로 성곽고고학자 (나라대학 학장. 성곽고고학의 제1인자. 저서는「노부나가의 성」, 「전국(戦国)의 성을 걷다」)

센다 : 이 시마바라의 난. 특히 하라 성의 공방은, 전국시대의 공성전, 농성전과 비교해봐도
이만큼 처참한 싸움이 일어난 것은 매우 드물다. 하라 성이 어떤 성이었는가, 또 시로가 어째서 하라 성을 선택했는가?
이 시마바라의 난을 살펴보는데 있어 하나의 열쇠를 쥐고 있다. 라고 생각한다.








철학자, 카야노 토시히토(萱野稔人)
츠다주쿠대학 교수. 정치, 경제, 문화까지 폭넓게 논하며 사상계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저서「국가란 무엇인가」등

카야노 : 키리시탄 잇키. 즉, 종교 대 정치라는 점에 가장 흥미가 있다.
종교 vs 정치는 민중이 바라보기에는 무엇에 따를까하는 문제. 신앙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정치권력을 따를 것인가.
이렇게 정치과 종교가 대립했을때 어느쪽을 따를 것인지는 (민중들에게 있어) 매우 큰 선택이 된다.
그런점에서 볼때 나는 종교과 정치의 문제, 근대의 기초를 만든 두가지의 대립에 매우 큰 흥미를 가지고 있다.







국제교섭관, 시마다 쿠니히코 (島田久仁彦)
元 UN 분쟁조정관. 다수의 분쟁지역에서의 화해교섭에서 활약했다. 저서, 「교섭의 프로페셔널 국제조정의 수라장에서」 등

시마다 : 제 자신이 경험했던 국제분쟁에서의 교섭은 진짜 목숨을 진검승부의 장소였고,
마침 이 시마바라의 난에 있어서도 노부츠나측도, 시로측도 매우 진지하게, 여러가지 문제가 얽힌 교섭을 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금 카야노씨가 말하셨지만, 저는 이 아마쿠사의 난에 비슷한 건 9.11 동시다발테러라고 생각한다.
먼저 첫째로 종교문제가 얽혀있다. 정치 그리고 경제, 문화의 충돌. 여러가지 문제가 얽힌 분쟁이라고 생각한다.








뇌과학자 나카노 노부코
동일본국제대학 객원교수.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뇌과학의 관점에서 다각적으로 분석한다. 저서, 「뇌내마약」등

나카노 : 사실, 아마쿠사 시로에 대해서 조사해보면 실체를 잘 알 수 없다. 서민의 기대를 한몸에 구현화한듯한 아마쿠사 시로.
라는 카리스마.한편 상대측은, 지혜 이즈라고 불리는 인지(人知)를 한곳에 모은 근대합리주의의 화신일지도 모르는 남자.
근대합리주의자와 마술적 세계의 대비. 라는 것이 매우 재밌는 구도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부터 무엇이 일어나는지 읽어나가고 싶다.

그럼,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는 배경과 잇키군의 리더 아마쿠사 시로의 선택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도시대 초기. 막부에 의한 키리시탄 금지령. 즉, 금교령으로 인해 전국의 키리시탄 신자는 가혹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때 국외에 추방당한 외국 선교사의 예언이 아마쿠사 지방 주변에 남겨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후에, 하늘에서부터 신의 아이가 나타나 기독교를 이 땅에 재흥시킬 것이다. 「도쿠가와 실기(德川実記)」







선교사의 예언대로, 25년 뒤에 나타난 것이 아마쿠사 시로였다. 시로는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면서 신의 아이라고 불렸다.
원래 무사의 집안에서 태어난 시로. 가족은 모두 키리시탄이라고 한다.







17세기, 지구에서는 세계규모의 이상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마바라, 아마쿠사 지방도 역시 심각한 기근에 직면한다.
하지만 번주가 취한 정책은 가혹한 것이었다.
증세를 하며, 이에 응하지 않는자는 엄청난 고문을 했다. 사람들은 구세주 시로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칸에이 14년 (1637년) 10월 25일


시마바라의 백성이 대관을 살해. 이틀뒤 아리아케해(有明海)를 둘러싼 아마쿠사에 전쟁의 불씨가 튄다.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잇키 세력은 시마바라 반도 남부에 있는 하라 성(原城)에서 합류.
일설에는 3만 7천명의 대군세로 부풀어올랐다고 한다. 이렇게 시로의 잇키 세력은 하라성을 거점을 막부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소동의 제1보가 에도성에 도착한 것은 2주일 뒤.

잇키 진압을 위해서 쇼군 이에미츠의 신뢰가 두터운,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重昌)가 총대장으로 발탁되어 출진했다.
하지만 이때 막부는 몇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칸에이 15년 (1638년) 정월. 막부군에 의한 하라성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막부군의 사상자는 속출. 게다가 총대장인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총탄에 쓰러져 전사해버렸다.
초전을 시로가 이끄는 잇키세력의 대승리로 끝났다.









막부의 오산은 먼저 시로가 농성하던 하라 성에 있었다. 성곽연구의 제1인자. 센다 요시히로씨와 함께 그 수수께끼를 쫓아보았다.

(성은) 이런 단애절벽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수직이랄까, 오버행하는 형태.
이런 단애를 넘어서 혼마루를 공격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 매우 군사적으로 발달한 요새의 형태를 그대로 취하고 있다.










단애의 위에 있는 혼마루 터. 하라 성은 반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에 폐성되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년의 발굴조사로 성의 의외의 실태가 떠올랐다.







센다 : 지금 여기에 지면에 여러개의 큰 돌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하라성의 혼마루로 들어가는 오오테문(大手門)의 초석.
모두 여기 위에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 장소에 매우 큰 야구라몬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대한 야구라몬을 통과하면 그 너머로는 미로와 같은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코구치(虎口)라고 하는 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구조이다.

센다 : 야구라몬을 들어와서도, 이시가키로 둘러싸인 통로가 되있다.

높은 방어력을 자랑하는 실전적인 성. 그것이 하라성의 정체였다. 시로가 이 성에서 농성을 한 것도 납득이 간다.







강함의 비밀은 아직 더 있다. 발굴된 주거터로부터 잇키세력의 실체가 떠오른다. 신기하게도 아궁이터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으로 볼 때 잇키세력의 식사는 집중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농성자들은 단순히 모인 집단이 아니라, 조직적인 군단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출토된 수많은 십자가.
납총탄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성내에 있었던 키리시탄 이외 농민들의 결속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시로의 부친을 시작으로 주군을 잃어버린 낭인들도 있었다.
잇키군의 강함의 비밀은 낭인들이 백성을 통솔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최강의 성에 농성한 시로.
그는 싸움 너머에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보통 농성은 원군인 고즈메(後詰め)를 상정하는 것이 철칙. 막부군에게 포위당한 농성군의 리더. 시로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자.







시로 : 현재의 위정자에 의한 키리시탄 박해로 인해, 지금에 와선 적어졌다고 해도 전국각지에는 아직 신자들이 남아있을 터.
그렇다. 전국의 키리시탄에게 궐기를 요청하는 것이야. 그렇게하면 이 싸움도 유리하게 될터.


1. 키리시탄의 원군

막부측의 기록 綿考輯錄 에는 이렇게 적혀져있다. "각국의 키리시탄이 일어날 것이다."

실제로 시로의 세력이 각지에 사자를 파견했던 것이 적혀져 있다. 하지만 우리들도 그렇지만, 봉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 농성이 길어지면 성내의 결속도 무너질 것이다.
초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잇키세력 속에는 성내에서 도망치는 자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시로는 잇키세력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서「시로핫토가키(四郞法度書)」라고 불리는 규칙서를 만들었다.

'땔감줍기와 물떠오기를 구실로 성외로 나가는 자가 많다고 한다. 엄하게 단속할 것'
'서로를 소중히 여기면서 의견을 나눠야한다. 성내 사람들은 후세까지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규칙서에서 보이는 시로의 고뇌. 아무리 결속력을 높여도 계속 막부군은 파견되어 올 것이다. 좀 더 강력한 방법이 필요하다.








2. 외국의 원군

그렇지. 우리들의 동료는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야. 키리시탄 신앙을 가르쳐준 나라. 포르투갈.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은 어떠한가. 농성측의 정황을 드러내는 서장이 지금도 남아있다.「壺井家文書」그곳에 놀랄만한 것이 적혀져 있다.

"다음달 말이 되면, 외국인들이 대선단을 이끌고 잇키세력에 가세를 할 것이라고 들었다."







당시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였다.

카톨릭을 믿는 포르투갈은 전국시대 일본에서의 무역과 포교를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금교령으로 인해서, 선교사들은 일본에서 쫓겨나 일본에서 포르투갈의 지위는 저하되고 있었다.

한편, 무역관계로 에도막부로부터 새로운 비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 프로테스탄트였던 네덜란드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종교적 대립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 진출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다.
실제로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고 있었을 동안, 인도의 고아만에서 포르투칼과 네덜란드의 함대가 무력충돌하기도 했다.







핫토리 히데오 (큐슈대학 대학원 교수)
제2, 제3의 시마바라의 난, 하라성의 봉기가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일개소의 반란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치안은 매우 혼란스럽게 되고, 아마도 이를 타서 기독교국의 총재인 포르투갈 같은 나라가
역시 일본내의 키리시탄을 지원하러 오는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구원을 요청할 대상은 전국의 키리시탄인가? 외국세력인가? 다음 한 수에 고뇌하는 시로.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막부군이 시마바라에 도착했다. 총 12만의 군사를 이끌고 있는 것은 로쥬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지혜 이즈와 시로. 결전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쿠사 시로의 선택 2가지.

1. 일본 전국에 숨어있는 키리시탄의 봉기를 기대한다.
2. 외국, 특히 포르투갈의 원군을 기다린다.








센다 : 지금까지 각지의 숨어있는 키리시탄에게 반란을 요청한 것은 비교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근년의 연구로 사실은 포르투갈의 원군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한 작전을 잇키군이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만약, 포르투갈의 원군이 실제로 하라 성 근처의 바다에 나타난다면,
이는 바로 잇키군과 막부군의 싸움이 아니라 유럽 vs. 일본이라는 싸움으로 바뀌게 된다.

애시당초 하라 성이 있는 지역은 전국시대부터 남만선이 입항하고 있었던 국제적인 장소.
때문에 하라성에서 농성하고 있었던 사람들도 그러한 국제정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이런 전략을 세우는 큰 원동력이 되었던게 아닐까.






시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시로와 잇키군이 무엇을 진짜로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만약 자신들이 전부 죽어서 순교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키리시탄을 일본 국내에서 인정받게 만들수만 있다면 아마도
첫번째 초이스인 숨어있는 키리시탄(카쿠레 키리시탄)에게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물론 뭔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있었다면.
방금 전에 나온 것처럼 예를 들자면 사자를 보냈다거나, 편지를 보냈다거나.
하지만 실제로 (궐기를 재촉하는 서장이) 각지에 도착했을지에 대해서는 퀘스천 마크. 라고 생각한다.

두번째, 외국측에 대해서는 확실히 기대도 있고, 쉽게 올 수 있는 바닷가라는 점도 있지만, 여기에는 큰 의문이 남는데,
방금 전에 선생님께서 말하신 것처럼 유럽 vs. 일본이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이 될 것이라는 점에 서 볼 때,
시로는 (외국세력) 에게 버림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두 선택지 모두 현실성이 없다.








카야노 : 시로에게 있어 가장 큰 과제는 내부의 결속을 단단하게 하는 것.
내부의 결속이라는 것은, 지금 자신들만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키리시탄이 아닌 자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든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밖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도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자신들이 고립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걸 고려한 두가지 선택이기 때문에, 잘 되기만 한다면 어느쪽이라든 상관없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나카노 : 현재의 우리들이 볼 때, 이 싸움의 목적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당장은 농성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승리하기보다는 (막부군이) 공격하는 것을 포기해줬으면 하는 심정.
그런 '자신들의 신앙을 허락해줬으면 좋겠다.' 라는 심정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외국에게 원군을 부탁하면, 전쟁이 격화될 것이 아닌가.

한편, 첫번째 선택지 키리시탄의 원군를 기대한다고 해도, 전국에서 키리시탄이 봉기를 하면, 오히려 박해가 심해질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어느쪽의 선택지도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매우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생각한다.







카야노 : 정치권력에게 있어 종교의 무서움은 내세까지 약속하는 것.
정치는 세속적 권력이기 때문에 현세에서의 행복은 보장해줄 수 있다. 제대로 식량을 생산하고, 모르는 사람한테 습격받는 것을
막아주는 등. 그러한 현세에서의 치안, 안전, 안녕이라는 것은 보장해줄 수 있지만, 죽은 다음까지 돌봐줄 수 없다.

하지만 종교는, 방금전에 봤던것처럼 '시로핫토가키'에도 있었지만, "내세까지 친구다" 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잇키들에게 여기서 죽더라도, 다음세상이 있다라는 형식으로 생(生)의 너머까지 지탱해줄수 있다.
여기에 뭐, 종교의 무서움이랄까. 그들의 결속력이 있다.








이소다 : 이 1과 2의 선택지가 과연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을 때, 나는 어느 조건하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외국의 원군이 올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다.
다만, 외국의 원군이 오기 위해서는 (내가 보기에) 2,3개월 안은 무리기에, 최저 1년에 가까운 300일에서부터 500일 정도가 필요하다.
때문에 그 동안의 식량과 탄약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만약 외국의 원군이 온다면, 이에 호응해서 국내의 키리시탄이 봉기할 가능성이 있으니,
2에서 1로 연쇄해서 도쿠가와 막부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300일 동안 농성하면서 외국의 원군을 기다린다는 전제하에서 이 난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대관을 죽이고, 불평이 쌓여왔던 것이 우와와하면서 일어난 우발적인 난이기 때문에
시로에게 있어 300 ~500일에 가까운 시간의 확보를 하지도 못한 채로 전쟁에 돌입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자, 그럼 지금까지 계속 패배하고 있었던 막부군을 어떻게 바로 세워나갈 것인가.
막부 제일의 두뇌 마츠다이라 노부츠나와 아마쿠사 시로의 두뇌전이 시작됩니다.








반란의 진압을 맡게 된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노부츠나에게 있어서도 총대장 이타쿠라 시게마사의 전사와 거듭되는 막부군의 고전은 예상외의 일이었다.
노부츠나는 잇키세력을 얕보지 않고, 방비를 굳건하게 한 뒤, 하라성을 엄중하게 포위했다.










당시 양군의 배치도가 남겨져 있다. (嶋原御陣図)
벼랑 위에는 잇키세력이 틀어박혀있다. 육지측에 긴 책(柵)을 치고, 하라성을 포위하고 있는 막부군.
세이로우(井楼,정루)라고 불리는 야구라에서 성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외에도 노부츠나는 여러가지 작전을 시도했다.

1. 종군한 노부츠나의 장남이 남긴 '시마바라 아마쿠사 일기(嶋原天草日記)' 이에 의하면
노부츠나는 지하도를 파서 성내에의 침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농성측도 구멍을 파서 불과 분뇨를 던져서 이를 저지.








2. 닌자를 잠입시켰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하지만 이것도 실패.
잇키 세력의 말은 큐슈의 방언. 게다가 키리시탄 용어가 섞여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결국 정체가 들통났다고 한다.







노부츠나의 작전은 좀처럼 효과를 보지 못했다. 공성전에 고뇌하는 지혜 이즈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자.









1. 강공책

키리시탄 신앙을 용서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대로 시간을 보내면, 각지의 키리시탄과 포르투갈이 가세해올 가능성이있다.
희생을 무릅쓰고 이 대군으로 공격하면 곧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노부츠나가 착진하고 일주일 뒤. 하라성을 둘러싼 아리아케해에 서양선이 나타났다.
이는 노부츠나가 의뢰한 네덜란드의 배였다.
네덜란드 세력은 잇키세력이 농성하고 있는 하라성에 대포를 향하고 포격했다. 하지만 하라성의 피해는 놀랄정도로 적었다고 한다.
사실 이 공격을 뒤에는 노부츠나의 계략이 있었다.









'네덜란드선에 부탁한 이유는 잇키세력의 간부들이「남만에서 원군이 온다」며 농성하고 있는 다른 자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국선에게 공격을 시키면 다른 자들도「원군 같은건 오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고 키리시탄놈들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않을까'

네덜란드 선에 의한 포격은, 외국의 원군을 기대하고 있는 시로의 세력에 대한 노부츠나가 실시한 심리전이었다.

하지만 무력에 의한 토벌은 아군, 적 모두 희생이 크다. 게다가 성 안에는 키리시탄 이외의 농민들도 많이 있다.
과연 그런 가혹한 선택을 해도 되는 것일까.
성내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나라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농민들.
무력에 의한 토벌은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백성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노부츠나의 갈등이 있었다.

역시 무(武)가 아니라 교섭에 의한, 회유책 밖에 없는 건가.









2. 회유책.

잇키는 애시당초 영주에 대한 불만이 계기. 농민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저항을 그만두게 한다.
이렇게 하면 희생도 적고, 막부의 면목도 세울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야부미(矢文) 작전. 노부츠나는 성내에 편지를 보내 좋은 조건의 화해안을 제시.






"투항하는 자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농작을 허락한다. 쌀 2천석을 지급하고, 올해 연공은 면제한다."「신찬어가보(新撰御家譜)」

하지만 성내로부터의 대답은 강경했다.






"아무리 공격해와도 우리들이 승리하고 있습니다. 이쪽에는 부상자도,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신찬어가보(新撰御家譜)」


신앙심이 깊은 시로의 세력은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 예상외의 야부미가 노부츠나에게 날아왔다.







성 안의 대장 3명은 벌해도 상관없다. 대신에 남은 농성자들의 목숨을 살려줬으면 한다.「잇키농성지각일일기(一揆籠城之刻日日記)」

이는 분명히 시로와 의견을 달리하는 서장이었다. 노부츠나는 잇키 세력의 결속이 굳건하지 않은 것을 확신.
농성자들의 실정을 살피기 위해서 직접 사자를 보내, 시로에게 서장을 건넸다.

'쇼군가는 키리시탄을 처형할 의향이다. 하지만 무리하게 키리시탄이 된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것이다.
아마쿠사 시로는 그저 떠받들여진 것 뿐이니, 성에서 나오는 자는 목숨건질수 있다.'


이는 노부츠나에게 있어 최대한의 양보였다.
하지만 시로에게 보낸 사자가 선물을 들고 돌아왔다. 귤과 만쥬, 감자 등의 풍부한 식량. 항복은 하지 않겠다는 시로의 의사표명이었다.

"네 이놈, 시로. 건방진 녀석."

힘으로 공격할까, 회유하는가, 어느 쪽이 득책인가. 선택에 고뇌하는 노부츠나. 결단의 때가 다가왔다.









자, 힘으로 밀어붙여 총공격을 택할 것인가, 혹은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키리시탄 신앙을 버리게 만들어 회유를 시킬 것인가.
큰 결단을 하게 된 노부츠나네요.







나카노 : 저는 1의 강공책을 택하겠습니다. 이 시대, 이에미츠의 시대이죠?
아직 막번체제가 완전히 성립되었다고 말하기 힘든 시기에 만약 이 사태가 전국에 영향을 줘, 일제히 봉기라도 일어나면 견디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종교집단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방법은 기적을 깨뜨리는 것이 제일.
어째서냐면 그들은 내세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종교적인 인센티브를 기대하고 신앙하기 때문에 이를 깨뜨리는게 제일 좋은 방법.
내세는 없을지도 몰라, 저사람을 믿어도 천국에는 못 갈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공격이 된다.







카야노 : 나카노씨로부터 본보기(見せしめ)가 중요하다라는 말이 나와서 가슴이 덜컹했네요. 저는 회유책을 택하고자 하네요.

먼저, 포인트가 2가지 있다. 첫번째로 상당수의 농민들이 참가했다는 점. 강경책으로 나가면 주민, 농민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이 잇키 뒤의 사회운영을 생각해야된다는 점에서, 가능한 죽이지 않는다. 라는 점.

또, 하나는 종교과 정치의 대립이라는 것이 큰 포인트.
만약 정치 대 정치의 대립. 다른 다이묘가 반란을 일으킨거라면 그것은 정치 vs. 정치의 대립이니 전면적으로 강경책을 써서,
그쪽이 무력을 사용한다면 이쪽도 무력을 사용하겠다. 라면서 하면 되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신앙. 새로운 권력을 세우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정당성의 레벨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최종적 과제가 된다. 때문에 강공책이 아니라 회유책.
요는 무력으로 단순하게 진압하는게 아닌 대응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마다 : 저는 회유책을 고르겠습니다. 역시 직업상(전직 UN 분쟁조정관) 이쪽을 고르지 않을 수 없네요.
이런 경우 야부미를 쏘거나 하면서 노부츠나가 교섭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성측에 보였다.

이때, 양측 모두 키리시탄이라는 것이 정반대에 있었다.

막부측은 키리시탄은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이 이에미츠의 명령이다 라고.
성측은 하라성에 있던 시로 일당은 막부가 키리시탄을 용납해줬으면 한다. 일단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애시당초 엇갈리는 것을,
레드라인이라고 하는데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뭐, 기본적으로 교섭이 성립될 요소는 없었지만.
다행이었던 것은 나중에 '대장 3명을 벌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머지는 살려줬으면 한다' 라는
이게 교섭, 회유가 가능했던 유일한 포인트였지 않았을까.

이렇게 흘러갔을때, 노부츠나가 해야될 중요한 일은 키리시탄의 키라는 말도 꺼내지 않아야하는 것.
자신에게 있어 그것(키리시탄)은 완전히 교섭재료가 아니라고. 아웃 오브 퀘스천이라고.
키리시탄이라는 말을 교섭재료에는 올리지 않는 것.
만약, 이러한 회유가 실패하게 되었다면 이는 노부츠나가 키리시탄이라는 말을 교섭에 사용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센다 : 저는 강공책을 선택하고자 합니다. 노부츠나가 짊어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강공책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실상이 아닐까.
시간을 투자해서 포위하고 있으면, 병량이 바닥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저 하라 성은 바다에 접하고 있으며, 매우 물살이 복잡한 곳.
육지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막부군도, 바다쪽 포위는 사실 완벽하지 않았다. 실제로 때때로 바다쪽 포위는 잇키군에게 뚫리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병량을 완벽하게 끊었다라고 할수도 없다.

그리고 막부군이 12만의 군대를 파견했는데, 고전한다고 하면 이는 각지에서 키리시탄의 잇키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게다가 당시는 나가사키에 포르투갈인이 있었던 시대.
굉장히 먼 마카오(포르투갈 점거)에 직접 정보를 보내지 않아도. 잇키군이 하라성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은 금방 나가사키까지 전해졌다.
뭐,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포르투갈의 원군이 올 가능성을 생각하면 역시 강공책으로 성을 공략하는것 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이소다 : 저는 회유책에는 별로 메리트가 없다고 생각한다.
회유책을 취하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아, 그렇구나. 반란을 일으켜도 죽는건 주모자 뿐이구나. 우리들은 안 죽는구나." 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국의 백성들에게 발신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불만이 생겼을 때. 누군가를 추켜세워 다들 고성에 틀어박히게 된다.
그럼 여기저기서 3만, 4만의 백성들이 고성에 틀어박히기 시작하면 무섭다. 진압수준이 아니게 된다. 역시 회유책은 택할수 없다.








노부츠나와 시로. 싸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과거 시마바라를 다스리고 있었던 아리마 가가 쏜 야부미에 잇키세력이 응한것도 그때였다.

노부츠나의 명령에 의해 성 가까이의 해변에서 잇키 세력의 부장 야마다 에모사쿠(山田右衛門作)와의 회담이 실현되었다.
그곳에서 밀약이 맺어지게 되었다. '막부군을 성으로 끌어들여, 시로를 유괴. 생포한다는 것이었다.'
노부츠나는 어째서 시로를 생포하려고 한 것일까.

핫토리 히데오 : 역시 종교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죽었을 경우. 순교자가 된다.
가르침에 따라 탄압 속에 죽으면 미화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함과 역시 생포하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반란은 막부의 실책이기 때문에 두 번 다시 (키리시탄) 봉기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 정보입수를 하는 것이 중요.
또, 지금까지 카리스마 적인 존재의 시로가 이렇게 무참하게 되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생포.








하지만 에모사쿠의 배신은 금방 들통나고, 붙잡히게 된다. 노부츠나의 교섭도 점차 힘들어져갔다.








그런 와중에 노부츠나는 잇키 세력의 위 속을 조사시킨다. 쌀 알은 없고, 푸른 풀 같은 것과 보리 잎 밖에 없었다.
성내의 병량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노부츠나는 확신했다.

총공격인가, 아니면 이대로 회유책을 계속하는가. 제장의 의견은 갈리고, 군사회의는 분규. 결단은 총대장인 노부츠나에게 넘겨졌다.
장기에 걸친 대진으로 막부군의 결속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면 생각치도 못할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고민 끝에 노부츠나는 총공격을 결심한다.

칸에이 15년 (1638) 2월 27일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사력을 다한 싸움은 다음날까지 계속되어, 막부군 12만명 중에서 사상자는 대략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시로는 생포하고자했던 노부츠나의 뜻에 반해 쿠마모토의 번사에 의해 사망하였다.
이렇게하여 2개월에 걸친 노부츠나, 시로의 시마바라의 난은 종결되었다.












농성하던 잇키세력의 대부분이 살해되었다고 전해지는 시마바라의 난.
하라성터에는 지금도 엄청난 수의 사람뼈가 발굴되고 있다.
뼈에는 손상이 많고, 그 위에는 이시가키의 돌이 눌려져 있었다. 게다가 상반신과 하반신이 인위적으로 절단된 것들이 많았다.
농성한 잇키세력이 죽은 뒤에도 막부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했었던 것일까.








센다 아키히로 :  카쿠레 키리시탄을 현재 나가사키의 현내에 오무라라는 곳에서 발견했을때 처지로
머리무덤(首塚,쿠비즈카)와 몸통무덤(胴塚,도즈카)을 나눠 묻었다.
기독교 인간들은 부활한다 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도 한 이유. 그런 것을 생각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게 아닐까 생각된다.









하라성에 있는 시로의 묘비. 근처 민가의 이시가키에 묻혀있었던 것을 여기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
전란 후에, 시마바라, 아마쿠사에서는 농민이 격감. 논밭은 황폐화되었다.

이렇게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각각의 리더들의 결단과 결말을 살펴보았습니다.







시마다 : 역시 어딘가에 교섭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대장 3명을 벌해도 되니, 나머지는 살려줬으면 한다." 이렇게 조명관련해서 야부미가 날아왔지만,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거절. 그런것은 할 수 없다고 돌려보냈지요. 노부츠나 측에서 보면 믿을만한 상대가 없었다. 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그걸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어떤가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가는 여전히 큰 물음표.







카야노 : 어떻게 보면 기독교와 막부 사이에서 서로 백성의 쟁탈전을 벌였다. 이런 백성 쟁탈전에서 노부츠나는 이기지 못했다.
그게 결국, 그렇게 되니까 백성의 쟁탈전에서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노부츠나가 할 수 있는 해결은,
(하라성에서 농성하는) 전원을 기독교 신자로 만드는 수 밖에 없다.
농민으로서, 더 이상 이쪽으로 회유해 말을 듣게 만들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철저하게 탄압할 수 밖에 없다.

최종적으로 기독교의 신성을 철저하게 벗겨버리는 싸움을 해야됐고, 농성하고 있는 밑바닥층의 농민들까지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마바라의 난의 잔학성은 거기서 온게 아닐까.

시마다 :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는 양측 모두 진 싸움.
시로측은 물론 전멸해서 전부 죽었고,
노부츠나는 방금 말하셨듯이 교섭에 있어서 반드시 떼놓고 임해야했었던 부분 + 그리고 백성 쟁탈전에서 실패했다.








나카노 : 하지만 아마쿠사 시로 측에서 보면 패배한 싸움은 아니지 않았나.
왜냐면 지금 현재 역사에 그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라는 점. 즉, 그는 이긴게 아닐까요.







이소다 : 저도 아마쿠사 시로가 이긴게 아닐까 싶어요.
어째서냐면, 저는 이 지방에 있는 카쿠레 키리시탄의 고문서를 찾아서 몇번이고 방문했었다.
거기서 카쿠레 키리시탄의 자손들도 말하고, 그들이 남긴 고문서를 읽어봤는데, 거기에 놀랄만한 것들이 적혀있었다.

카쿠레 키리시탄은 엄청나게 존재했고, 막부도 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서로 인정하고 존재했다는 역사가 있었다.
1805년에 저사람 카쿠레 키리시탄 아니냐 하는 촌장이 나타났다. 그렇게 되면 막부의 로쥬한테까지 이야기가 가게 된다.
왜냐면, 당시 일본의 국법상 키리시탄이라고 인정되는 순간 모조리 처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천명 단위의 키리시탄이 발견되었을때, 에도막부가 카쿠레 키리시탄을 전부 죽이느냐면 그럴수 없었기에,
하나의 단어를 생각해냈다. 그들을「종문이 그릇된 자(宗門心得違いの者)」라고 불렀다.

이건 완전히 관료작문 ㅎㅎㅎ 너희들은 키리시탄이 아니다. 뭔가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안 죽여도 된다고 해서, 그렇게 키리시탄들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역시 아마쿠사, 시마바라의 난의 공포. 그렇게 완전히 씨를 말려버리는 것의 부작용을 막부는 인식하고 있었다.
시마바라의 난은 그렇게 수만명의 사람들을 저승길로 함께 데려갔었지만,
키리시탄을 종문이 그릇된 자(宗門心得違いの者)로서 막부에게 인식시키고,
인정하게 만든 상태를 수백년간 지속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볼 때 아마쿠사 시로는 이 싸움에서 이겼을 가능성이 있다.









장절한 결말을 맞이한 시마바라의 난. 그 후의 역사는 이 비극적인 전쟁을 계기로 크게 바뀌었다.
시마바라의 난 종결 후 다음날, 노부츠나는 제장을 모아. 이렇게 선언했다.'더 이상 이 땅은 적지가 아니다.'
노부츠나는 이미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땅의 부활을 시야에 넣고 있었다.

노부츠나는 잇키세력만 처분한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만든 시마바라 번주 마츠쿠라 카츠이에에게도 벌을 내린다.
영지를 몰수하고 단죄했다고 한다. (칸에이 15년, 1638년 7월 19일).








반란 후, 아마쿠사 지방은 막부의 직할지가 되었다.
노부츠나는 카미가타(上方) 대관으로 활약한 스즈키 시게나리(鈴木重成, 1588~1653)를 아마쿠사에 파견.
노부츠나의 뜻을 받아들인 스즈키는 고쿠다카를 반감하는 등. 부흥에 인생을 바쳤다.








아마쿠사 각지에 남겨져 있는 돌 사당. 에도시대부터 이어지는 스즈키사마라는 민간신앙이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부흥에 힘을 다하셨다.
그 은혜를 느끼고, 은혜를 입은 자신들이 그대로 둬서는 안된다하는 소박한 형태로 마을에 돌사당을 세웠다.'








나가사키현 이키츠키지마(生月島,생월도). 여기에는 시로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한 키리시탄들이 존재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카쿠레 키리시탄의 의식.
시마바라의 난 이후, 막부는 대규모 키리시탄 박해를 절제하고, 민중 또한 무력봉기라는 수단을 택하지 않았다.
카쿠레 키리시탄의 신앙은 막부의 감시를 피해 에도시대에서 살아남았다.

선조대대로부터 우리 집안에는 이러한 신이 있고, 계속 이렇게 해왔다.
(신앙은) 자연스럽게 생활속에 있는 것. 이어받았다기 보다도,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것이 정확하다.


시마바라의 난이 끝나고 1년 뒤, 막부는 포르투갈 배의 내항을 금하고, 쇄국체제를 완성한다.
쇄국 속에서 200년 가까이 전쟁이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세계사상 얼마 볼 수 없는 장기간의 평화시대가 실현되었다.








시마바라의 난 뒤, 노부츠나는 에도시대 최대의 화재. 메이레키의 대화(明暦の大火,명력의 대화) 부흥에 진력했다.
서민의 생활을 지키기 위한 정책실현에 분주했다.
시마바라의 난으로부터 25년 후, 67년의 천수를 마감했다. 막부의 기둥을 떠받치던 인생이었다.
이렇게 시마바라의 난이라는 비극적인 전쟁이, 그후 에도 막부의 평화정권을 실현하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이소노 : 에도시대를 통틀어, 시마바라의 난 이후, 대규모의 민중봉기는 없었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시마바라의 난은 아마쿠사 시로가 일본인 전체에게 남긴 선물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서로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면 큰 일이 벌어진다라는 암묵적인 양해가 생겨났다.


그러니까, 이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잇키에 대해 다이묘가 방대한 양의 총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승총의 수평발사는 절대 멋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만약 엄청난 농민반란군들이 성을 포위했을 경우, 막부와 로쥬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저히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화승총을 수평발사를 해 백성을 살상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카이에키(改易,영지몰수)」까지는 몰라도「텐포(転封,영지교체)」는 틀림없었다. 그렇게 벌을 받아, 영지가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통치능력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

이는 아마쿠사, 시마바라 난의 사례로부터 민중이 얻어낸 것이고, 영주 또한 학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정자에게 있어 백성이라는 것은 보물. 이라는 것이 뼈 속까지 스며들게 된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는 안한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보이지 않는 (쓰여지지 않은) 평화헌법이 영주와 백성 사이에 걸쳐지게 된 사건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센다 : 시마바라의 난은 꽤 과거의 일이지만,
방금 전의 말에서도 나왔듯이 사람의 역사속에서 수없이 벌어진 종교와 정치의 대립에서 봐도 상당히 보편성을 지닌 사건이라고 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마바라의 난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는 것에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이렇게 더 이상 싸움의 역사는 끝.
보복전쟁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하는 형식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시마바라의 난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일.







카야노 : 근대국가의 확립에 성공한 나라는 내전이 꽤 일어나기 어렵게 되있다는 것.
그러한 프로세스의 단락을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국시대 먼저 다이묘끼리의 내전을 극복해나는 과정, 뭐, 노부나가라든가 히데요시 등의 사람들이 이를 극복했고,
이번에는 종교. 내면에 관여되는 식으로의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라는 것.
유럽은 그런 종교전쟁을 거쳐서 근대국가를 만들어나갔다.
시마바라의 난은 그렇게 내전을 극복해나가는 프로세스의 집대성이랄까 마지막 프로세스였다고 생각한다.








시마다 : 저는 직업상 그런 국제분쟁을 맡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세상. 현재에 대해 비판을 하자면,
노부츠나와 같이 수습하는 위정자랄까 리더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
최종적으로 서로 이렇게 없던 일로 하자. 라고 말하지도 않고, 곧장 바로 미사일을 쏘거나 한다.
결국 그렇게 되면 분쟁은 이녀석한테는 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되서, 서로 마구 쏘아대면서 점점 상태가 심각해진다.
어떻게 사태를 잘 수습하는가하는 점은 불분명해진채로, 매우 기분 좋지않게 현재를 살아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쿠사 시로는 확실히 죽었고, 3만 7천여명을 함께 저승길로 데려갔으며,
다른 한쪽은 그렇게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뭐, 좋게 사건을 잘 마무리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것을 희망해봤다.
저는 그냥 조정관입니다만 ㅎㅎㅎ








이소다 : 최근 국경에서 폭력이 넘쳐나는 것 같다. 이라크, 우크라이나,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이러한 시기에 어떻게 국경에서 서로를 평화로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에도의 천하태평. 국내에서는 서로 죽이고 죽이지 말자라는 것을 실현한 이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점을 오늘 강하게 느꼈다.









덧글

  • TAVRIS 2016/08/20 00:54 # 삭제 답글

    정말 도움이 많이 되는 자료입니다. ㅎㅎ
  • 지나간 2017/11/11 18:35 # 삭제 답글

    시마바라에 관한 자료를 찾고 있었는데 많은 도움이 됬습니다
  • ㅇㅇ 2018/01/07 21:20 # 삭제 답글

    몇년전 방송했던 kbs 역사저널 그날하고 굉장히 비슷한 포맷의 방송이네요
  • 지나가는 2018/06/01 18:46 # 삭제 답글

    저 동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영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동네는 우민화가 계속 진행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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