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의 선택 :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결단 영상문화생활




종합적으로 보니까, 요시노부가 당시 그렇게 행동했던건 원래부터 정치적 욕심이 없었고 + 유독 천황에게 약했던 면이 있어서 그런듯.
포스트 쓰다보니까 감상도 아니고, 통번역도 아닌 또 이도저도 아니게 됐음. ㅠㅠ 뒤로 갈수록 번역위주이긴하다.

싸워야하는가? 물러나야하는가?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결단.

이번회는 사쓰마번 오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왕정복고 쿠데타 정보를 미리 입수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그들의 처리를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살펴보는 내용.

1.무력진압책 / 2.정관책


이 두가지 선택을 정치학, 뇌과학, 문학, 역사학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눠본다.

당시까지의 일본 역사의 흐름.
1863년 사쓰에이 전쟁 1865년 제2차 쵸슈정벌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 15대 쇼군 취임
1867년 5월 24일 효고 개항 칙허 10월 14일 대정봉환 12월 9일 왕정복고정변 1868년 1월 3일 도바 후시미의 전투

英雄たちの選択「最後の将軍 徳川慶喜の決断」14.07.10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그로 말하자면 흔히 대정봉환이라고 해서 막부로부터 정권을 조정에 독단으로 반납
그리고 신정부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안티 히어로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근년에 들어와 그의 정치수완을 평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요시노부 없이, 일본에 메이지 유신은 없었다라는 것이다.

요시노부는 대개 로쥬에게 정치를 맡겼던 역대 쇼군들과는 달리 정치적 최전선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외교분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쇼군. 즉, 자신의 목소리를 낼줄 아는 쇼군.
당시 외국에서는 그를 일본의 새로운 국왕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외교적 수완의 결과, 외교교섭과 통상은 막부 위주로 진행되게 되었다.





21세기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사람. 지금풍으로 이야기하자면 '사토리 세대' 같은 느낌.
현실에서 한발자국 물러나서 관찰하고 생각하는 타입.

16세 때 그는 자신을 도쿠가와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던 움직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천하를 쥐는 것만큼 귀찮은 일은 없다."

그야말로 동란의 막부말이라고 불리는 뜨거운 열기의 세상속에서 저런 소리를 했던 사람 ㅋㅋ
한마디로 말하면 귀차니스트. 그럭저럭 소박한 삶을 보내고 싶었던 사람. 사진을 보면 이미 귀차니스트의 포스가 엿보임 ㅋㅋㅋ 

이심공(二心公)


이중성이 있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오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책사와도 정치적인 대결을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막부의 패배선언이라고 알려져왔던 대정봉환도, 신체제를 장악하려는 요시노부의 야심이 숨겨져 있었다.

무력 토막파 (사이고 타카모리, 이와쿠라 토모미,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서
외교주도권을 장악하고 무역이익을 독점하는 막부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조정에 영향력을 발휘해서 토막의 밀칙을 받아낸다.

하지만 이때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했던 것이 바로 대정봉환. (1867년 10월 14일)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 스스로가 정권을 조정에 반납함으로서 토막파가 쓰러뜨리려는 막부 자체를 없앤던 것.
그 결과 오오쿠보 등의 토막파는 토막계획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요시노부가 조정에의 정권 반납을 이야기한 건백서

"요시노부가 정권을 돌려드리는 것은 일본을 해외열강과 나란히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앞으로도 국가를 위해서 일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습니다.
전국의 여러 다이묘들에게도 장래의 국가 만들기에 의견이 있는 자는 이 요시노부에게 의견을 내도록 명했습니다."


즉, 정권을 반납했어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국정에 관여하며 여러 다이묘들의 의견을 자신이 하나로 모아가는
실질적으로 막번태세를 유지하는 신체제를 조정에 건의한 것이다.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자는 의견, 그러나 그 체제는 요시노부 체제였다.



이소다의 지론 : 도쿠가와 에도 막부는 14대 장군에서 끝났다는 역사관을 가지고 봐도 된다.
요시노부는 15대 쇼군이 아니라, 요시노부가 만든 초대 교토 막부의 초대 쇼군이다.
저렇게 말 잘하는 쇼군은 도쿠가와 요시무네라도 하지 않을까 싶은, 에도 후기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타입.

타카하시 (소설가 = 문학) :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나다. 서양문명을 잘 평가하는 능력.

나카노(뇌과학) : 자기 평가가 높은 사람. (이러한 나르시스트 같은 사진을 봐도 잘 알수 있지 않을까.)
카메라를 인식해서 포즈를 취하는 등. 자신은 지금까지의 쇼군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미야자키 (정치학) : 요시노부 같은 사람이 정치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리얼한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가들이) 가장 상대하기 힘든 사람.

외교력으로 여러 다이묘들을 제압하는 쇼군.

일본 내에서는 외국에 대한 반감. 양이감정이 강한 가운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먼저 나서기가쉽지 않은데,
요시노부는 스스로 나서서 개국노선을 취했다. 젊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노회(老獪)함이 전혀 없다.

독단형 쇼군.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대정봉환이 가능했다.



기사회생의 책, 대정봉환.

진짜 사쓰마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위협적인 한수. 막부를 쓰러뜨리기 위해 칙허까지 받았는데, 쇼군 스스로가 정권을 반납했고,
위에서 언급한 건백서에 따르면 요시노부가 신체제에서 의장처럼 행동하면서 요시노부 주도의 의회가 생길 가능성도 발생한 현 상황.
물론 요시노부 주도의 체제가 진행되면, 신정부 내에서 사쓰마의 입지는 그저그런 수준에서 머물게 됨.

게다가 실제로 저렇게 갑자기 정권을 조정에 반납하면,
조정은 막부라는 체제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대략 700여년동안 정치를 해본적이 없음.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다시 정권을 운영하게 되면, 이는 막부의 사람들이 움직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에치카 (역사학) : 지금 우리들 후세의 인간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놀랍지 않지만,
당시의 인간으로서 이를 현실문제로 예상, 생각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오쿠보 같은 인물들은 요시노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인물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신정부에서 배제시키려고 했던게 아닐까? 왕정복고 쿠데타로 이어지는게 아닐까.



이소다 : 학교에서 대정봉환을 막부의 끝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대정봉환은 카부라야(鏑矢,우는살) 오히려 정치개전이다. 대정봉환이라는 정치적 수를 상대 측에 내던진 것.


오오쿠보가 요시노부를 배제하기 위해서는 천황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천황친정을 실현하고, 구 막부세력를 배제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젊은 천황인 메이지 천황을 수중에 넣는 것이 중요했다.

오오쿠보는 천황의 외조부였던 쿠게 나카야마 타다야스(中山 忠能)을 통해서 천황의 회유를 극비리에 성공시킨다.
쿠데타 당일은 사쓰마 번병으로 어소를 봉쇄.
사이고 타카모리의 지휘 아래 요시노부의 개입을 배제시키고, 단숨이 신체제를 수립하려고 한다.



오오쿠보와 요시노부가 그리는 미래의 일본상에는 차이가 있었다.


오오쿠보가 생각하는 개혁은 도쿠가와의 개혁보다 훨씬 더 발본적인 개혁.
현재 삿쵸의 정치리더들은 구 하급 가신들의 출신인데, 그렇기에 종래의 신분제를 없애고 싶었다.
그리고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쇼군가를 없앰으로 인해서 대개혁을 실현, 출발점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일본의 개혁을 얕은 부분에서 머무를지, 더 깊은 곳까지 개혁시킬지가 두 세력의 문제와 선택.





(게이오 3년 12월 6일자)

하지만 쿠데다 결행(12월 9일) 직전 사태는 생각치 않은 전개를 맞이한다. 근년 놀랄만한 사료가 발견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실 오오쿠보의 쿠데타 계획이 사전에 요시노부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이 서한은 막부를 지지하는 에치젠 번이 요시노부에게 보낸 것. 쿠데타의 대응책을 취하도록 귀뜸하고 있다.

"사쓰마의 오오쿠보, 사이고, 쿠게의 이와쿠라 토모미가 밀모를 꾸미고 있다."
"그렇게 되면 교토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명한 요시노부공이기에 반드시 책략을 준비해, 사쓰마의 계획을 실패로 끝나게 해줄 것이 틀림없다"


요시노부의 배제를 목적으로 은밀히 준비되어가고 있었던 쿠데타. 이를 사전에 알게된 요시노부에게는 어떠한 선택지가 있었을까.



1. 무력진압책


오오쿠보와 사이고 일행이 무력으로 움직이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기선을 제압해서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은 어떠한가?
다행이도 교토에는 아이즈와 쿠와나 등 아직도 많은 구 막부군의 군세가 남아있다.
이 군사력을 사용해서 무력토막파를 교토에서 일소하는 것이다.
교토의 사쓰마번저를 단숨에 공격해 오오쿠보 일행을 죽여버리면, 모략을 미전에 저지할수 있을 것이다.

이때 교토에는 아이즈번과 쿠와나번 합쳐 5천의 구 막부군 병력이 있어, 군사력에서는 오오쿠보 일행을 압도하고 있었다.
즉, 요시노부측에서 선제 쿠데타를 일으켜서 사쓰마를 교토에서 추방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는 또 다시 교토에서 전란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
무력을 행사하는 경우, 교토는 물론이고 이를 시작으로 국내에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서구열강이 내정간섭을 해올 위험도 존재.



2. 정관책

그렇다면 여기서는 사태를 정관(静観) 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오오쿠보 등의 무력토막파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지금은 무엇보다 우선해야하는 것은 일본에 내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요시노부는 내란의 방지를 위해서 각번의 다이묘들에게도 강하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이를 알려주는 막부 중신들의 서한이 남겨져 있다.





이에 의하면, 쿄토에는 막부의 전복을 꾀하는 세력이 일야백호하고 있으며, 조그만 계기로 내란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불온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쇼군님은 밤에도 잠을 들지 못하신다.
요시노부는 측근과 신판(親藩) 다이묘들에게 절대로 내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줬었다.



"비록 무력에 의한 모략이 일어난다고 해도 대의가 없는 것은 오오쿠보 측이다. 대정봉환을 한 나에게 어째서 모략을 꾀하는가.
아이즈, 쿠와나 이외에도 오와리나 에치젠, 토사번 등도 나를 지지해줄것이 틀림없다.
무력에 기대지 않더라도 내 복권의 길은 자연스레 열릴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젊은 천황이다. 이 불측의 사태에 미카도(천황)를 휘말리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때, 아직 16세였던 젊은 메이지 천황.

천황을 내세우려는 오오쿠보 일행의 쿠데타에 요시노부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될 것인가? 선택의 때는 다가오고 있었다.



선택지 선택 시간. (패널의 여러의견이 오간다.)

그의 퍼스널리티를 생각하면 희생을 내는 선택지인 1번 무력진압책은 당연히 선택하지 않을거라고 본다.
정관책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측으로 갈 수 있는 수가 남아 있는 이상 그로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던게 당연하다.

무력은 '혁명을 하는 측의 논리'. 즉, 삿쵸의 논리였고, 요시노부는 스스로에게 理가 있었다고 생각했기에 정관책.

나카노 :
다들, 요시노부의 입장에서 생각하시는데,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1번 무력진압책.
이미 무력으로 혁명을 이루려고 하는 사쓰마에게 자신은 대정봉환의 수로 대응했는데도, 또 무력쿠데타를 꾸미는 것을 보면,
이미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이는 무력으로 진압할 수 밖에 없다.

미야자키 :
나는 요시노부 스스로가 자신의 통치능력에 자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신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는 철저항전 1번을 골랐을리는 없다.

나카노 :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리즈메(理詰め,이리를 따지는 것)와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이러한 것에 대해 이론으로 따고 들어가면 생각치도 않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정관책이 리스키한 선택지.




이에치카: 나는 우유부단한 성격이라서 정관책이랄까 선택을 내리지 못했을 것 같다. 요시노부도 마찬가지지 않았을까?

금문의 변 : 1864년 7월 쵸슈번이 사쓰마, 아이즈, 쿠와나와 교토에서 무력충돌한 사건.

그리고 요시노부는 교토에서 금문의 변이 일어나 교토가 전화에 휩싸이는 것을 가까이서 봤기 때문에,
그런 시각적 영향이, 그런 사태만은 피하고 싶게 만들지 않았을까.
또 그 사건은 당시 아이즈번이 발단이라고 교토 사람들이 이야기 했었으니, 어쩔 수 없이 정관책을 취하지 않았을까.



타카하시: 즉, 정관책을 취한게 아니라 무력진압책을 취할 수 없었다

요시노부는 거의 페펙트한 인물인데, 단 하나 약점이 있다. 바로 천황에게 약하다는 점.
그만큼 이지적이고 현대적인 인텔리. 총체화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무언가를 결정할때 천황이라는 문제가 나오면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나는 그의 이러한 점이 수수께끼라고 생각한다.




오오쿠보 일행의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게된 요시노부,

일본의 신체제를 둘러싼 주도권을 건 싸움에서 요시노부가 택한 선택은 사태를 정관하는 정관책이었다.
교토가 전란에 휩싸이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케이오 3년 12월 9일 이른 아침


오오쿠보의 쿠데타는 실행된다. 사이고 타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의 번병이 어소의 문을 모두 봉쇄.
계획을 아는 자 이외는 출입을 금한다. 그리고 메이지 천황에 의한 왕정복고의 대호령 발령.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수립된다. 신정부에는 호족을 시작으로 쿠게, 사쓰마, 쵸슈 등의 각번 유지가 입각.
하지만 요시노부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요시노부의 편을 들었던 섭관가의 폐지가 결정. 요시노부에게 있어 좋지 않은 사태가 되었다.

이때 요시노부는 전란이 되는 것을 피해 교토에서 자신을 호위하던 아이즈, 쿠와나의 군세를 오사카로 후퇴. 상황을 지켜본다.




이때 어소의 회의에서 나온 오오쿠보의 제안이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요시노부의 사관납지(辞官納地)


요시노부로부터 나이다이진(內大臣,내대신)의 관위를 박탈하고, 도쿠가와의 천령 800만석을 몰수.
신정부의 재원으로 하겠다는 안이었다.
그러자 오오쿠보의 편을 들었던 여러 다이묘들 사이에서 의념이 일어난다.

왕정복고의 목적은 쇼군, 막부뿐만 아니라, 다이묘제 그 자체를 없애려는 것이 아닌가.
오오쿠보의 주장은 단숨에 불협화음을 부르고, 요시노부는 신정부에 맞이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높아져간다.



처음에는 도쿠가와의 영지를 명목상이라도 일단 빼앗아, 타격을 주고, 권위를 빼앗아
도쿠가와 세력을 약체화시키겠다는 의도였었는데,
이는 오히려 이 안을 요시노부가 받아들인다면, 요시노부를 신정부의 의정으로서 추대하겠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나타나 버렸다.
만약에라도 요시노부가 의회에 들어오게 되면, 도쿠가와 주도의 의회가 될것은 불보듯 뻔한 일.

이렇게 되자 삿쵸(사쓰마 + 쵸슈), 이와쿠라 토모미 등의 쿠데타 세력들이 생각한 것보다 상황은 훨씬 안좋은 상태가 되었다.
이 이상으로 사태가 흘러가면 우리들이 신정부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게이오 3년 (1867년) 12월 24일,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신정부의정직, 신정부에 받아들이는 것이 결정된다.
대정봉환의 묘수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요시노부 주도의 신체제가 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는 오오쿠보에게 최후의 각오를 하게 만들었다.

오오쿠보 : 이렇게 된 이상 사쓰마 일국이 되어도 전쟁을 하겠다.



게이오 3년 12월 25일

이때 사쓰마번의 낭사들은, 에도 시내를 방화 등의 테러행위로 교란.
결국 사쓰마의 테러 도발에 넘어간 쇼나이번(막부)이 사쓰마 번저를 불태워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에도의 사쓰마 번저가 불태워짐에 따라 사쓰마 번내의 의견은 단숨에 무력토막으로 기울어 결속되고, 전투준비에 들어간다.

한편, 요시노부가 있는 오사카에서도 아이즈와 쿠와나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
가신들의 격정은 요시노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타오른다.





케이오 4년 (1868) 1월 3일

결국 삿쵸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의 무력충돌 = 도바 후시미의 전투가 발발. 상황은 요시노부에게 있어 최악으로 흘러간다.
신정부군이 천황의 군대임을 가리키는 니시키(錦,비단)의 어기(미하타)를 게양. 요시노부는 천황에 거역하는 조적(朝敵)이 된다.
요시노부측의 군대는 무너지고, 불과 3일만에 패배하게 된다.

그래도 오사카 성에 있는 아이즈, 쿠와나는 전의를 잃지 않았다.
당시 최강이라고 불렸던 막부의 해군을 에도에서 오사카만에 모으기만 하면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이때 경악스러운 사태가 벌어진다.
오사카 성에서 분전하는 가신들을 남겨두고, 요시노부가 돌연 오사카성을 탈출해 에도로 향한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요시노부는 정관책을 선택했는데요. 이소다 상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소다 : 저는 준군사적으로 생각해서 정관책은 이해하기 힘들다. 천황을 수중에 계속 두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오오쿠보, 사이고 등의 무력으로 토막을 하겠다는 무력토막파는 사쓰마 번에서도 소수파.
그들의 신병을 확보하거나,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는데 요시노부는 하지 않았다.

이에치카 : 요시노부 최대의 미스는 교토를 떠난 것이다.
왜냐하면 천황을 빼앗긴 것. 권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봤을때 이때가 최대의 터닝포인트였다.



타카하시 : 하지만, 천황을 취하는 것(인질로 잡는 것)은 절대로 못할 사람이었다.
니시키노 미하타가 나와서, 자신들이 조적이 된 시점에서, 요시노부의 속에서는 아 끝났구나 라고 생각했지 않았을까.
그의 최대 약점이 천황임을 생각해볼 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 것.
나는 아직도 요시노부가 오사카 성을 탈출해 에도로 돌아간 점에 대해서는 대장으로서 올바른 행동인지라고 생각한다.

이에치카 : 그만큼 요시노부 안에서는 조정과 천황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큰 비중을 차지 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미야자키 : 정관책을 취했어도 삿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어소회의를 열어서 요시노부의 영지를 몰수하고, 관위를 박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무력토막의 명분이 안나오니까,
에도 시내를 테러를 통해 대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쇼나이번의 분노를 폭발시켜,
사쓰마 번을 불태우게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보신전쟁의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정관책도 나름의 정치적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이에치카 : 현지의 사쓰마번저에 있는 사람들이 폭주해갔다.
그래서 사이고가 이래선 안된다고 말렸음에도 때에 맞추지 못했다. 여러한 의미에서 시대.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던 것.
역시 시대성이라는 것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소다 : 그는 역시 이상은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선을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천황의 곁에 다툼을 일으켜 천황을 휘말리게 하는 것은 적(賊)이고 인간이하라고 생각했다.

나카노 : 나는 이렇게 제대로 착실히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안 흘러가는 것인가. 왕정복고 쿠데타 같은 것이 일어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분노로 싸우는 아군이 기분 나빠져서 (오사카 성 탈출) 그랬던게 아닐까

이에치카 : 어떤 의미에서, 요시노부가 한 일들은 올바른 일이었다. 대정봉환, 교토를 초토화시키지도 않고.



미야자키 : 자신들이 시대에 휩쓸려간다는 것에 대한 체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에치카 : 불물 안가리고 일을 저지르는 것만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 이러한 것은 크게 에도 후기 교양인의 모습.
이러한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당시의 역사는 이해할 수 없다.





조적이 된 요시노부는 도바 후시미의 전투 패전후, 구 막부군을 두고 에도로 귀환한다.
도쿠가와가의 영묘가 있는 칸에이지(寬永寺)에 들어가, 더욱 큰 싸움을 이야기하는 주위를 물리치고 스스로 근신의 몸이 된다.



프랑스로부터 요시노부에게 증정된 진바오리.
이때까지 막부를 지지해왔던 프랑스에서도 그의 재거를 바라는 요청이 있었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싸움을 피한다. 그리고 칸에이지에서의 근신중 에도총공격을 결단한 신정부군에게 한통의 서한을 보낸다.

"이번의 사태는 그야말로 이 요시노부의 부족함이 계기이며, 어떠한 처분도 받을 각오가 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에도의 서민에게 고통을 주는 것만큼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모든 죄는 이 요시노부에게 있으며, 벌하겠다면 나만을 벌했으면 한다."


내란을 피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한 요시노부.
그후 전화는 아이즈가 있는 도호쿠로 확대되었지만, 전국이 내란에 휘말리는 일은 없이 전쟁은 종결된다.

이렇게 도쿠가와의 시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오오쿠보 일행이 견인하는 메이지 신정부가 시작된다.
오오쿠보는 판적봉환, 폐번치현, 무사계급의 소멸을 꾀한 질록처분 등 몇백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봉건제도를 일소한다.

불평을 품은 구 사족들로부터 도쿠가와 부활의 요청이 있어도, 요시노부가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일은 없었다.
신정부에 따라 근신을 계속하며 구 막신들이 가까이 오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 후 요시노부는 어떻게 살았는가? 40여년에 걸친 취미인으로서의 긴 여생.
수렵, 유화, 사진, 호기심이 가는데로 취미에 파고 들어, 정치와는 무연의 매일을 보내며, 서민들의 생활에도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요시노부의 오명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것은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30년이 흐른 뒤였다.
메이지 31년에는 천황을 배알하고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4년 뒤에는 66세에 공작 작위를 받게 된다.

이는 요시노부가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임을 신정부가 인정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패하는 것을 철처히 함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그가 최후에 택한 궁극적인 선택.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자기자신의 큰 역할임을 알았다.

다이쇼 2년 11월 22일 요시노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77세.
죽기 직전에 그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

"이에야스공은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서 막부를 열었다. 나는 그 막부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쇼군이 되었다."



막부를 없애기 위해 쇼군이 된 요시노부.

이소다 : 나는 결과적으로는 도막(倒幕)장군이라고 봐도 될 정도라고 생각한다. 요시노부의 개성이 큰 영향을 주었다.

미야자키: 쇼군 스스로가 막부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으니, 막부를 쓰러뜨리려고 하는 측에서는
훨씬 더 볼티지를 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게 시소게임처럼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체제,
과거의 제도를 모두 털어버린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었다.

만약 이러한 볼티지가 낮았다면 과연 같은 역사를 걸었을까 의문이다.

타카하시 : 유신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정부에 스카우트 되어가는데,
요시노부라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정치사회라는 시스템 자체를 싫어했던게 아닐까.

미야자키: 그렇다는 말은 오히려 막부 해체 후에는 스스로 해방되려하지 않았을까.

타카하시 : 유신의 30년 후에, 그는 메이지 천황과 만나게 되는데,
자신은 시스템에서 해방된 사람으로서, 그리고 천황은 새로운 시스템 속, 상자 속의 새로서 살게 되는데, 굉장히 상징적인 만남.
그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과거의 쇼군과 천황, 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나가노 : 그때까지의 요시노부는 자신이 태어난 집안, 사명을 이루기 위함이 어딘가에 있었지 않았나.
하지만 그 이후가 되면, 방금전의 해방되었다는 말처럼 자신의 취미를 위해 살았다.
그런 것은 요시노부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이를 위한 수십년이 아니었을까.

이에치카 : 요시노부는 굉장히 큰 의미에서 시대를 바꾼 키 퍼슨(Key person)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함에도 일반인들은 그러한 것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전쟁을 저지한 것도 요시노부. 그가 저지하지 않았다면 전쟁이 되었다. 그 결과가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세계적으로 봐서도 큰 의미를 가지는 혁명. 그 중의 하나가 희생자가 적다는 점. 이러한 것은 요시노부의 공적.
중국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은 천만명 단위, 프랑스 혁명도 나폴레옹 전쟁을 포함하면 200만명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타카하시 : 나는 이사람은 전략적으로 그런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런것 같다. 오사카 탈출 등을 보면.
역사의 카메라로 가장 멀리서 잡으면 가장 좋은 선택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잡으면 뭐하는 짓인가 싶은 행동들. 
이런 것을 보건대 어떤 의미에서 요시노부라는 사람은 부감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 그러한 것이 극한까지 살려진 일이라고 본다.

이소다 : 나는 요시노부는 후지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이에서 보면 단순한 돌 투성이지만,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그리고 이렇게 일본을 근대화 시킨 초석이 되었으니, 혹시 후지산 처럼 세계유산같은 남자일지도 모른다 ㅋㅋ



미야자키 : 그러한 점에서는 부작위를 가지고 영웅이 되고, 과묵으로 큰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존재다.



이에치카 : 역사는 사람의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점이 있는데, 요시노부를 없애려고 했던 자들은 전부 요시노부보다 먼저 죽었다.
사이고가 메이지 10년, 오오쿠보는 메이지 11년에 키오리자카에서 암살.
그리고 요시노부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졌던 메이지 천황의 죽음까지 보고, 죽었으니.

최근에 요시노부의 사진을 지인으로부터 받았는데, 이는 메이지 시대에 웃는 요시노부의 사진.
잘 웃지 않는 요시노부의, 메이지 시대에 그가 웃는 사진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미야자키 : 40년간의 정쟁이 그를 좋은 얼굴로 만들었던게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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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ede 2014/07/15 00:38 # 답글

    요시노부가 있었기에 에도가 불바다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봤던 기억이 나네요. 잘 읽고 갑니다!
  • ㅇㅇ 2014/07/15 07:13 # 삭제 답글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 DeathKira 2014/07/16 16:00 # 답글

    예전에 학교에서 배울 때 느꼈습니다만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제 역할을 다 마치고 평화롭게 살다간, 비교적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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