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제1회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학을 싫어하는가 도서







도서밸리에서 하루키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보고, 1회를 번역해봤다.



막말로 간단요약하면, "하루키의 책은 문학적 독자들이 아닌 평소에 책 존나 안 읽는 일반 독자놈들이나 지지하는 책." 이라는 평이 지금까지의 주류.


하루키의 데뷔작은 당시의 대부에게는  "외국서적 번역물을 지나치게 읽은 놈이 버터냄새나게 쓴 하이칼라물"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었음. 또한, 그는 같은 계열이라고도 볼 수도 있는 오에 겐자부로를 필두로 한 개혁파들의 반대도 거세게 받았다. 그렇게 일본에서 수년이 흘렀는데 후에, 하루키의 작품이 점차 국내를 비롯해서 외국의 일반독자들로부터 더욱 큰 반향이 오자, 당시 일본문학계는 하루키 문학의 상업성에 떼굴멍ㅋㅋㅋㅋ 그게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상황.


현재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거론되는 등 일본 문학계의 탑이라고 취급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루키의 상업성에 패한 굴복한 것이기 때문에, 작품의 문학성에 대한 심도깊은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의 복종. 때문에 여전히 순문학계는 속으로는 하루키의 작품에 대해 문학적으로 패한게 아니라, 그의 상업성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은거라고 생각한다. 이거 뭐 그야말로 일본 순문학계는 면종복배(面従腹背)의 상태. 또한, 현재는 여러 미디어 매체조차 하루키붐이 가진 상업성으로 인해, 혹여 그에게 생채기라도 입힐까 안절부절 못하며 그의 문학성에 대해선 좀처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기괴한 상황까지 발생하는 실정. 오오미 언터쳐블 무라카미 하루키 ㅋㅋㅋ


이러한 하루키 문학에 대한 일본의 現 상태(=속으론 하루키의 문학성을 인정하지 않는 문학계와 신경질적인 미디어 매체의 태도)를
상기 필자는 알고 있는 상황. 그래도 외국에서 반향이 큰만큼 외국에서는 문학성이 인정받고 있었을 줄 알았는데 ㅠㅠ 서양의 문학자층은 하루키에게 감탄하고, 다소 인정하는 반면에, 동아시아(중국, 한국 등의 유교권 국가)에서 문학적으로 고렙이라는 사람들은 일본처럼 하루키는 거들떠 보지도 않음 ㅋㅋㅋ 이러한 사실을 직접 국제 심포지엄에서 듣고 쇼크먹음 ㅋㅋㅋ


중국, 한국에서도 하루키는 평소에 문학을 잘 안읽던 놈들이나 소란떨고 읽어대지, 고도의 독서인, 지식인, 문학자 층은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경악할만한 현실을 접하게 됐다. 심지어 하루키는 젊은 척하는 소설가라면서 한국에서 하루키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지식층은 없다는 단언까지 들었음. 그래서 필자는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조차 스스로를 순문학계의 이단아, 문외한이라고 말하며, 자리매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루키 작품을 순문학의 계보 선상에 올려놓고, 작품의 문학성에 대해 논하는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이하,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제1회의 전문 번역.



출처 :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가토 노리히로의 '무라카미 하루키 론' 페이지.
http://ja.wikipedia.org/wiki/加藤典洋
http://www.iwanami.co.jp/web_serials/kato/index.html
http://www.iwanami.co.jp/web_serials/kato/DOCs/01.pdf






1.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학을 싫어하는가



기묘한 고독


여기서의 목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달성의 실질을 측량하는 것이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꽤 진지하다.

어째서 지금 이러한 것을 시도하는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둘러싸고는, 그의 등장 이래, 종래의 문학적 독자(순문학독자)와는 다른 일반독자층이 그를 지지하며, 흔히 말하는 문학계가 하루키의 인기를 경시하는 것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양을 둘러싼 모험』『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노르웨이의 숲』의 전기 3대 장편의 걸작군이 쓰여진 1982년부터 87년까지의 5년간 등은 과거에 나츠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등의 몇명의 문학자들에서 밖에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놀랄만하고 폭발적인 문학적 달성의 시기였지만, 그러한 때에도 그는 아직 소수파였다.『노르웨이의 숲』같은 작품은 간행수년만에 350만부를 넘는 미증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래도 그는 기성의 문학계 속에서는 대중에게만 먹히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낙인의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당시의 뿌리깊은 비판자의 급선봉은 전통적인「문단」적 문학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혁파라고 불리던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카라타니 코진(柄谷行人),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 등의 소설가, 비평가들이었던 것도, 이러한 것에 다소 관계가 있다. 이는 무라카미의 혁신성을 크게 대변해주는 것이었지만, 반면에 그의 고독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1979년에 무라카미가 데뷔했을 당시, 아쿠타가와상의 선고에 반대를 했던 사람은 문단의 대가적인 존재이기도 했던 장로작가 타키이 코사쿠(瀧井孝作)였다. (그는 하루키의 데뷔작을「외국의 번역소설을 지나치게 읽고 쓴듯한 하이컬러의 버터냄새 나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거의 10년 뒤, 완벽한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된 1987년 이후에는 새로이 오에, 카라타니, 하스미 등의 반문단적 전후문학자, 포스트모던기의 비평가들이 하루키 최대의 반대자로서 그를 막아섰다. (오에의 무라카미 비판론인「전후문학에서 오늘의 곤경까지―― 그것을 경험해 온 사람으로서」가 1986년, 카라타니의「무라카미 하루키의「풍경」」, 하스미의『소설에서 멀리 떨어져서』가 1989년에 쓰여졌다)

이런 경향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 1989년『양을 둘러싼 모험』의 영어판에서 시작된『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태엽감는새 연대기』와 그 작품들이 해외에 번역되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인기는 불이 붙어 작품은 순식간에 40여개 국이 넘는 나라에 번역되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인기 소설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해외에서는 찬양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점차 무라카미 하루키 부정론, 경멸론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00년대의 후반 이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언급되기 시작한 뒤로부터, 그는 일본에서도 문학계의 톱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하나의 헛바퀴질이 생겨난다. 그 분기점은 무라카미는 기묘한 고독, 혹은 고독을 택했다는 것이다. 기묘하다는 것은 그 고독에 이렇다할 문학적 근거가 없는 것을 말한다. 1995년 이후, 그는 더이상 사회를 등진 소설가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사회에서 발언했다. 그 해 지진의 피해를 입은 고향에서의 개작된 작품의 낭독회, 2009년 예루살렘상, 2011년의 카탈로니아 국제상에서의 스피치, 또 2012년 센카쿠 열도문제를 둘러싼 발언 등이다. 하지만 문학세계에서 그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한 명의 소설가로서는, 다른 소설가와는 만나지 않았다. 이러한 고립이 필연적인 요인이 아니라는 점이, 그 고립을 스타일리쉬 하고 취미적인 것, 근거박약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같은 어중간함, 헛바퀴질은 그를 배제해왔던 일본 문학계에도 있다. 일본 문학계는 지금에 와서는 그를 배제할 이유도 없고, 그에게 두팔을 벌리고, 그를 맞이하려고 하고 있지만, 이런 변화는 결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가진 문학적 힘에 의해서, 지금까지의 사고방식, 문학적 가치기준을 변화되고, 일본 문학계 스스로가 새로이 자신을 갱신시킨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요는 기개를 잃고, 무라카미 작품의 인기와 상품의 힘에 의해 무릎을 꿇고 엎드린 것이다. 불만의 무리들이 억지로 질질 끌려간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정말로 국내외의 다른 고도의 문학작품에 견줄만한 힘이 있는지, 혹은 그러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힘인가를, 이러한 문학적 질문을 둘러싸고 서로 견해를 주고 받을「자리」,「기회」 혹은「권위」가 사라져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절반 정도는 비평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나와 같이 무라카미를 오랫동안 평가해온 자들에게도 기묘한 부자유를 느끼게 만들었다. 무라카미에 대해 거리낌 없이 편히 비평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코바야시 요이치와 같이 일관되게 무라카미를 비평해온 강자도 있지만 (예를 들자면『무라카미 하루키론 ――『해변의 카프카』를 정독하다』,2006년), 많은 비평가들은 지금까지 비평성을 확산시키면서, 방관자, 해설가의 위치까지 후퇴해있다. (예를 들면 카와무라 미나토『무라카미 하루키를 어떻게 읽을까』, 키요스 요시노리『무라카미 하루키는 중독된다』둘 다 2006년). 이러한 때에 나는 연속해서 무라카미에게 엄하고 신랄한 문장을 3개 정도 적었다. 하지만 그중에 하나는 신문에 실리지 못했고, (「소설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2010년), 두번째 것은 작은 잡지에 실려, 같은 취지의 것이 영어 신문에 게재되었기에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지만,(「소설이 시대를 앞서나갔을 때」2013년, 인터뷰 Colorless Tsukuru Tazaki is an imperfect work but one of Haruki Murakami's most important,2014), 또 다른 하나의 신문서평은 마찬가지로 담당자에게 당초 표현이 너무「엄하다」라는 조금 자제해 달라는 감상이 와서, 저자로 하여금 멋대로, 의도적으로 난폭한 표현을 순화시켜달라고 시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기분 좋은 장소』로부터의 추방」2014년).

모든 미디어 매체들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이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하자면 공기로 된 번데기 같은 비문학적인 캡슐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도 이러한 이상한 자신의 처지에 몸을 움추리고, 해외 미디어의 취재에는 응하지만, 캐쥬얼한 국내의 ―― 흔히 말하는 대등한 관계의 ―― 다른 소설가와의 대담 등에는 응하지 않게 된 것이 벌써 25년 이상이나 지났다. 또한, 무라카미를 논하는 쪽에서도 무라카미에게 문학적으로 대치하겠다는 자세를 포기한지 오래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무라카미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이, 어떻게 국내, 혹은 해외에서 무라카미가 이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나 그「성공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거나, 혹은 이것과 평행해 그의「성공」에서「득을 볼 수 있는」방법의 다채로운 무라카미론이 쓰여지고 있다. 해외에서의 논평을 포함해, 현재의 무라카미는 문화를 이야기 하는데서의 절호의 소재, 지론전개 상에서의 좋은 화제제공자이다. 하지만 그러한 곳에서 그의 본질은 문화적 상징이며, 무라카미 작품의 본질은 상품이다. 그 속에서 무라카미에게 고도의 문학적 달성이 있었는지 어떠한지를 이야기하는 기본적인 의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수 없다.





동아시아에서의 평가

최근, 이러한 나의 감상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 있었다.

가까운 아시아의 여러나라, 중국, 한국의 구 유교권국가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지식인의 문학과 대중문학 사이에 장벽이 있다는 것은 나도 조금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가운데 무라카미의 인기가 대중적으로는 압도적인 한편, 지식인, 문학자 등의 고도의 독서인층에게는 진저리나는 물건이라는 것을 당사자들의 입으로 직접 들었다.

일의 상세는 다음과 같다.

2010년 8월 중국이 GDP로 세계2위인 일본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9월에는 센카쿠 제도 부근에서 중국어선 충돌사건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일본과 중국 사이에 긴장은 단숨에 높아졌다. 결국 다음해인 2011년, 3월 동일본대진재를 거치면서, 일본사회에는 불만이 비축되어 2012년, (당시)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는 센카쿠 제도 = 댜오위다오의 도유화 구상을 들고 나왔고, 이를 억지하려는 민주당 정권의 안이한 국유화 흐름이 움직여, 결국 이를 계기로 중국정부가 경화되어, 중국내부에서 반일데모가 퍼져나갔다. 중국 대도시의 서점으로부터는 단숨에 일본책의 번역본이 모습을 감추었다고 보도되었고, 이와 같은 시기 한국과는 다케시마 = 독도를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었던 일도 있어, 동아시아 여러나라의 국가간 대립은 단숨에 세계의 주목을 모으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2012년 9월 28일, 무라카미는 내셔널리즘에의 도취를「싸구려 술에 취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보다 깊은 교류의 견지, 심화를 말하는「혼이 오고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문장을 아사히 신문에 발표했다. 이에 대해 10월에 중국의 유력 소설가 옌렌쿠(閻蓮科,염련과)가 이에 응하는 문장을 쓰고, 그것이 미국 인터네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영어로 번역되고, 나아가서는 아사히 신문사에서 나오는 주간지『아에라』에 일본어로서도 발표되었다.

이러한 일과 그 후 분쟁의 심각화, 더욱이는 일본국에서 점점 거세어져가는 헤이트 스피치 등의 외국인 배척의 새로운 운동의 부상을 흐름 속에서, 2012년의 끝에 와세다 대학에서 기획되어 2013년 말에 열린 것이 바로「동아시아문화권과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국제 심포지엄이다. (2013년 12월 14일.)

총합사회는 소설가이자, 과거 편집자로서도 장대한 무라카미에의 인터뷰를 했었던 마츠이에 마사시(松家仁之). 그외 일본에서는 나를 포함한 몇명이 참가하고, 중국에서는 1년 전에 무라카미에게 응답한 소설가 옌렌쿠, 무라카미 작품의 번역가 시샤오웨이(施小煒,상해상달대학), 한국에서는『세기말과 소세키』와『한국에서의 일본문학번역의 64년』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윤상인(서울대학), 미국에서는 현대일본문학의 번역, 겐지모노가타리의 전파론 등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마이클 에메릭(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교) 등의 사람들이 모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지금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의의에 대해 여러가지 문제들을 토론했는데, 그중에서 다음과 같은 동아시아 문학자, 지식층들의 무라카미 평가에 대한 실상을 접하고,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무라카미 하루키는 동아시아에서는 거의 읽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 문학작품을 읽지 않는 젊은 독자들 사이에만 널리 읽히고 있다는 것. 물론 한편에서는「대인기」이지만, 고도의 독서인, 지식층, 문학자들은 거의 읽혀지고 있지 않았다.


또한「무라카미 하루키는 존경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1년전 응답의 당사자인 옌씨는 자신은 아베 코보(安部公房), 오에 겐자부로,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나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좋아해서 읽지만,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중국 국내에서 루쉰 문학상을 2번 수상, 그의 많은 작품들은 여러나라에 번역되었고, 그 중에 하나는 맨 부커상에도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국내에서의 별명은「발금작가(発禁作家)」. 지금에서도 일본어로 번역된 두 개의 소설은 국내에서 발매금지와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고 있다. 일부에서는 다음 중국인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는 이 사람이 아닐까하고 수군거려지고 있으며, 그 심포지엄 후, 올해 5월에는 2014년 프란츠 카프카 상을 무라카미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두번째의 소설가로 수상하기도 했었다. 그런 소설가가 무라카미의 작품에는 관심도 없고, 중국 문학자들 사이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존경받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무라카미의 어필에 대해 응답해 2012년 단문을 실은 것은, 예루살렘 수상 연설에서 예루살렘 비판(「벽과 알」), 그리고 당시 국경분쟁에 있어서의 싸구려 내셔널리즘에의 비판 등, 사회적인 문제에 과감하게 발언하는 무라카미의 용기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무라카미의 소설에 감동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런 말에는 2006년 국제 심포지엄(「하루키를 둘러싼 모험 ―― 세계는 하루키 문학을 어떻게 읽는가」)에 와서 무라카미의 소설에 크게 계발되었다고 말하면서, 해외에서 무라카미 소설에 크게 힘을 실어 주며 일본문학계를 알렸던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파워즈와 비교했을 때, 아찔할 정도의 큰 차이가 있었다.

라파엘 전파와의 관계 등 참신한 시각으로 런던 유학시설의 소세키의 경험을 쫓은 나츠메론으로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한 중후한 한국의 일본 문학가 윤씨도, 심포지엄의 단상에서 자신은 무라카미의 좋은 독자는 아니라고 몇번이고 잘라 말했다. 이 심포지엄에 참가하는 것에 주저했음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의 독서인, 지식인 사이에서 무라카미는 야구모자를 좀처럼 벗지 않는「젊어보이려고 애쓰는」 ―― 언제까지나 젊은 것을 좋다고 하는 ―― 소설가로서 비춰지고 있다고 말하며, 무라카미의 그러한 모습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며 신랄하게, 적어도 한국에서 무라카미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지식층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 누구도 무라카미가 현재 세계에서 인기 있는 소설가임에는 이론을 표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반드시 그가 문학자로서 존경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틀

확실히 이는 일본은 현 상태를 놓고 생각해볼 때, 그렇게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요 최근까지는 무라카미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이러한 발언자들이, 내가 봤을 때도 매우 매력적인 소설가, 지식인, 학자이며, 그들이 이를 말하는데서 진지함과 솔직함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질 높은 이웃나라의 작가, 학자들에게서 기탄 없이, 과거의 일본에서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무라카미관이 엿보인 것이다. 

여기에는 무라카미가 지금까지 어떠한 식으로 자신의 틀을 만들어 왔는지 그 원형이 얼굴을 비추고 있다. 

이 문제를 귀찮게 하는 것은 그러한 틀의 형성에 일본 순문학의 전통뿐만 아니라, 무라카미 자신이 손을 댔기도 했다는 점이다. 옌씨도, 윤씨도 무라카미를 전통적인 일본 순문학의 계보와는 대비적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옌씨는 자신은 카와바타, 미시마, 아베, 오에 등은 존경하고 읽지만, 이에 비해 무라카미 소설은 읽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씨도 나츠메 소세키 이래 일본의 전통적인 근대문학에 경의를 표하는 반면, 이에 비해 언제까지고「젊어 보이려고 하는 것」을 포기 하지 않는 무라카미에게는 딱히 존경할만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것은 무라카미의 자기규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라카미 자신도, 자신은 일본 근대문학의 이단아이며, 문외한이라고 오랫동안 국내외에서 언급해왔다. 이러한 자세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무라카미는 일본문학의 전통과 대립하고 있다. 무라카미 자신을 필두로, 무라카미의 비판자들도, 무라카미의 애독자들도, 모두 이 대립구도를 믿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무라카미를 둘러싸고 새롭게 떠오르는 이해의 도식, 새로운 틀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해의 도식을 거부하고, 무라카미를 일본 근현대 문학의 전통 선상에 올려놓는 것이, 지금 현재 가장 도전적이고 더욱이 적절한 시도이다. 일단 무라카미 자신의 자기인식은 제쳐두고, 그가 일본 근현대 순문학으로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무라카미를 무라카미 자신이 적대시하고 있는 일본 순문학의 범주내에 두는 것. 이것이 바로 기존의 틀을 타파하는데 가장 유효하고 신선한 기획이 아닐까 싶다. 

심포지엄의 장소에서 내가 얼마나, 이러한 생각을 동아시아의 이웃나라 사람들을 향해 충분히 전개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곳에서의 토론은 긴장감을 낳았지만, 지금 되새겨보면, 내용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 이렇게 쓰기위해 새삼스럽게 말로 옮겨보니, 이는 크게 다음과 같은 것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내 생각을 윤씨에게 말해보자면, 무라카미는 나츠메와 대립되지 않고, 옌씨에게 말하자면, 무라카미는 오에, 아베와 대립되지도 않는다이다. 예를 들자면 일본문학에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인 무라카미의『노르웨이의 숲』과 나츠메의『마음(こゝろ)』는 같은 화자의 구조, 주제로 이어져 있다. 또, 과거에 나는 오에의 무라카미 비판을 듣고, 오랫동안 양자를 대립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지만, 수년전 이 둘을 함께 시야에 놓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현대일본문학의 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한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을 바꿨다.「오에인가, 무라카미인가」에서부터「오에와 무라카미」로.「오에인가, 무라카미인가」의 양자대립이 아니라,「오에와 무라카미」를 함께 보고 이해하는 구도가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해, 당시「오에와 무라카미」라는 에세이를 썼었다. (「오에와 무라카미――1987년의 분수령」2008년).


하지만 이는 딱히 무라카미와 오에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오에도, 아베도, 미시마 유키오도 모두 등장했을 때는 기성문학에 대한 반역자였다. 일본의 현대문학은 이러한 과거에의 반역 그 자체를 하나의 전통으로 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와 오에에 대해 말할수 있는 것은, 그외의 다른 작가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1986년에 강력한 무라카미 비판자로서 나타난 오에도, 1995년에는 무라카미의『태엽감는새 연대기』의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식에서는 심사위원을 대표해 그 작품을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무라카미는 그의 작품을 선입관 없이 읽으면, 아베, 미시마, 오에와 대립한다기 보다도, 그 반역의 전통에서 이어지는 전후의 문학자 중의 한 명인 것이다. 더 말하자면, 다자이 오사무를 시작으로 카와바타 야스나리, 나가이 가후, 타니자키 준이치로, 나츠메 소세키 등의 근현대 일본 문학의 산맥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실로 지적 내장량이 방대한 문학자이다. 


나는 80년대 전반 이래, 무라카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오면서, 그로 인해 나도 꽤나「젊은 척하는」대중영합적인 비평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기에 나의 지적은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주요 문학적관심은 전후, 근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현대의 정신사, 정치와 경제에도 관계되어있다. 일본의 전후관에 대해 물의를 일으키는 평론을 쓰고, 좌익우익 양쪽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았던 악명 높은 평론가이기에, 나츠메에 대해서도, 미시마에 대해서도, 다자이에 대해서도 글을 써왔다. 그런 내가 무라카미를 긍정하는 의미는 당연히 젊은 그의 애독자들이 무라카미를 상찬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무라카미는 일본 순문학의 고도한 달성의 첨단에 위치해있으며, 딱딱한 소설가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다른 점은 그가 동시에 대중적인 인기, 해외에서의 평가, 인기를 얻어냈다고 하는 문학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한 점뿐이다. 이러한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무라카미는 야구모자를 버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다. 


자, 그럼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나로서는, 여기서 무라카미의 이러한 문학적 고도의 달성이, 중국의 현대문학에, 한국의 현대문학에 있어도 ―― 이외 다른 나라의 현대문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 남일이 아님을 나타내고 싶다. 세상의 무라카미를 좋아하는 애독자들에게는 미움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무라카미는 그러한 팬 이상으로, 그에게 무관심한 당신 이웃나라의 지식층에게야 말로 중요한 존재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친숙하지도 않고, 알기 쉽지도 않다. 결코 얕봐서는 안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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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아울베어 2014/06/29 12:10 # 답글

    일본 내에서의-지난번 번역해주신 것과는 영역이 다른 학계에서의 반응, 실로 흥미롭네요. 매번 이런 재밌는 것만 골라 번역해주시니, 역시 「불어난 오징어」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오게 된 것은 운명이었던 것 같습… 험험.
    일본은 「살아있는 작가」에 대해서 비교적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라고도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생전에도 비평이 없을리야 없고 당대에 띄우기도 깎아내리기도 당연스레 존재하겠습니다만, 작가 생전부터 작가론을 쓰곤했던(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했다는 의미에서) 한국의 「학문으로서의」 문학계에 비하자면 그러하다는 이야기겠지요. 동시에 「상업적인」 소설은 더더욱 매섭게 격리하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한국이 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흥미로운 글인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 魔神皇帝 2014/06/29 09:11 # 답글

    제 개인적인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느낌은 '장면장면은 감각적인 언어가 많은데 서사 전체로 놓고 보면 뭔 말을 하고 싶은거야?' 로군요.
    그래서 좀 재미없게 읽은 편이고... 좀 폄훼하자면 '감각적인 장면들 덕에 여성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고 그 여성독자들에게 말 붙이기 위해 남성독자들도 사는게 아닐까' 정도. 제 주변에선 여성독자가 남성독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거든요;;
  • 코로로 2014/06/29 10:09 # 답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평론 소개 감사드립니다
  • 앞서나가는 황제펭귄 2014/06/29 11:27 # 답글

    재밌네요.
    고등학교때 처음 접했던 하루키 작품에서 느낀 새로움이 나중에는 식상해져서 안 읽게 됐었는데 오히려 이런 평론을 보니 다시 보고싶네요 전 아무래도 청개구리가 분명한듯.. 잘읽었습니다
  • vindetable 2014/06/29 12:53 # 답글

    잘읽었습니다. 내가 아직 이글루스를 하고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포스팅이네요^^
  • ㅇㅇ 2014/06/29 20:01 # 삭제 답글

    요약해주신 내용만 읽었을 때는 하루키의 문학성을 까는 글인가 싶었는데, 본문을 읽어보니 오히려 반대 같네요.
  • pointer 2014/06/29 23:31 # 답글

    안그래도 요새 초기작부터 시작해서 중기까지 읽은 작가인데, 문단의 평가가 참 굉장하네요 ㅋㅋㅋ 저-기 윗분이 말하신대로 감각적인 묘사도 좋아하고 하려는 말이나 매 작품의 결말이 나름 맘에 들어서 꽤 좋아하는 작가인데 말이죠. 문단에서는 대체적으로 사회고발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을 높게 치지 않나요? 하루키가 문단에서는 이단아 취급을 받아도 대중적으로 먹히는 건 그런 부분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이야기랑 특정 소재에 관심있는 사람만 읽을 수 있는 이야기, 둘 중 독자 폭이 넓은 건 전자니까요.

    그나저나 에세이 보면 그냥 생활습관 고치기 귀찮아하는 아저씨로밖에 안보이던데, 책도 안읽었다고 하면서 젊어보이길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니 되게 묘하네요...
  • WeissBlut 2014/07/05 02:39 # 답글

    이러니저러니 해도 개인적으로는 그냥 문장이 세련된 라노베라는 이미지를 떼고 보기가 힘드네요
  • retaro 2015/03/08 12:21 # 답글

    일본 순문학이 전세대에 대한 반항이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 계보이다는 내용은 옛날에도 누군가의 평론에서 본 기억이 있는듯 한데요... 다음 회를 계속 읽어야 겠습니다. 그런데 링크를 따라가 보니까 4회부터 pdf링크가 올려져 있던데 2, 3회는 어디로 가면 볼 수 있을까요?
  • 책담 출판사 2017/03/29 11:13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언젠가 님께서 소개해주신 위의 연재글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를 만들게 되었어요.^^. 연락처와 주소를 알려주시면 책을 보내드리고 싶어요. 저희 이멜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chaekda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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