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K 스페셜, 일본 해군 400시간의 증언 제1회「개전, 해군은 있지만 국가는 없다」 영상문화생활




NHK 스페셜 : 일본 해군 400시간의 증언. 제1회「개전, 해군은 있지만 국가는 없다」






태평양 전쟁 개전의 열쇠를 쥐고 있었던 대일본제국해군・군령부.
모든 기본작전의 입안, 지도를 맡아, 절대적 권력을 쥐었던 군령부(軍令部)의 실태는 자료가 거의 없어,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해군반성회(海軍反省会)

이는 전후 35년이 경과한 쇼와 55년(=1980년)부터 11년간, 해군의 중추・『군령부』의 멤버들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모였던 회합이었다. 이때, 70~80대가 된 그들은, 자신들이 생존하고 있었을 때는 절대비공개를 조건으로, 태평양전쟁의 개전에 이르기까지의 경위, 그리고 그 배경에 있었던 정계・황족・육군 등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400시간에 걸쳐 동료들 사이에서 이야기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전쟁은 피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전쟁회피」라고는 점점 말할 수 없어져갔던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으로 죽은 일본인은 대략 300만명. 아시아에서는 더욱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져갔다.
당시 일본의 엘리트들은 어째서 개전을 결의했는가. 그들이 남긴 교훈이란 무엇인가.
일본 해군 400시간의 증언, 시리즈 제1회는 태평양전쟁에 돌입하게 된 경위를 당사자들의 증언으로부터 밝혀내보고자 한다.









NHK 스페셜. 일본해군 400시간의 증언 제1회「개전, 해군은 있지만 국가는 없다」



2009년 8월 9일에 방영된 NHK 다큐.

실제로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관여되었던 대일본제국 해군 군령부 멤버의 일부 육성기록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해군 반성회의 카세트 테이프는 오랄 히스토리로서의 가치가 중시되어, 2009년에 단행본 등 여러 미디어 믹스로 전개하기도 했음. 꽤 재밌게 봤기에 다보고 난 뒤, 국내에서도 본사람이 있나 싶어서 살펴보니, 자막이랑 해석본(링크)을 만든 사람도 있던데, 해석본을 읽어보니까 ㅋㅋㅋ 전반적인 흐름은 맞는데, 본인이 안들리는 한자랑 멘트는 지맘대로 해석해서 아주 소설을 써놨더라 ㅋㅋㅋ 중요한 발언들도 지맘대로 해석을 해놨고, 구질구질하게 글만 5개로 나눠놨기에, 걍 내가 모조리 전부 통번역 해봤다.

국내에 도는 자막도 저 번역본을 바탕으로 만든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냥 똥 ㅋㅋㅋㅋ

검색용으로 인명, 중요단어는 일본어로 적어놨고, 참고 링크도 첨부했음. 쉽고 빨리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짤도 포함, 글을 작성했다. 직접 영상 보고 싶은 분을 위해, 위에 영상도 올려놨다. (중일자막. 일본어 자막이 있으니 보기 편할듯.) (무자막본)







NHKスペシャル 日本海軍 400時間の証言 第一回 「開戦 海軍あって国家なし」




태평양전쟁 개전, 그 열쇠를 쥐고 있었던 9명의 참모들.







태평양을 질주하는 대일본제국해군 연합함대.

일본의 해군은 개전시, 전함 10척, 공모 10척을 보유하고, 세계 3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는 메이지 이래, 근대화를 추진했던 일본의 상징이었다.







쇼와 16년(=1941년) 12월 8일 : 하와이 진주만 공격. 일본은 태평양 아시아에의 세력확대를 꾀하며, 미국에 덤볐다.

이 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해군. 그 결과, 잃어버린 것은 수많은 목숨. 일본인 대략 300만명.
아시아 각국에서는 더욱 많은 수의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어째서 전쟁을 시작했는가?

이 전쟁은 누가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가. 전후 당사자들의 다수가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이 밝혀지는 일은 없었다. 작년(=2008년), 전직 해군장교의 유품 중에서 대량의 카세트 테이프가 발견되었다. 해군반성회의 기록, 개전시 해군의 중추에 있었던 사람들은 전후에 몰래 모여,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기억을 털어놓고 있었다.

・元 대령 : "책임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혼자에게만 있는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군측에 있다."
・元 대령 : "육군은 폭력범, 해군은 지능범. 둘 다 육군, 해군만 있는줄 알았지, 국가가 있음을 잊고 있었다."
・元 중장 : "진짜 진실을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진실은 알 수가 없다."







이 해군반성회에는 천황 직속의 전쟁지도기관(戦争指導機関), 군령부(軍令部)의 참모들이 다수 참가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작전을 입안한「해군의 두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은 전쟁의 대의를 충분히 묻지도 않고, 승산도 없는채로 개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군령부 작전과(軍令部作戦課) : 사나기 사다무(佐薙毅) 元 대령
"정말로 국력 그외를 검토해서 대미전(対米戦)에 이길수 있는가, 이길수 없는가라는걸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군령부 작전과 : 미요 카즈나리(三代一就) 元 대령
"군비확장을 위해서 꽤 예산을 썼다. 싸울수 없다고는 일절 말할 수 없었다"







元 중령 :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 쇼와로 점점 넘어감에 따라,
우쭐함과 교만은 점점 더 커져갔고, 자신의 주제를 모르는 폭주를 하여, 결국 일본을 파멸에 몰아넣었다."


지금까지 결코 밝혀지지 않았던 엘리트 집단, 군령부(軍令部)의 실상. 어째서 무참한 결말을 맞이할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이것은 그 당사자들의 고백 기록이다.








도쿄 하라주쿠, 해군반성회는 도쿄 하라주쿠의 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해군반성회에 참가했던 이치키 토시오(市来俊男) 元 대위, 현재 90세. 이치키씨는 반성회가 시작되었던, 쇼와 55년(=1980년)부터 헤이세이 3년(=1991년)까지 참가. 가장 젊은 멤버 중의 한 명이었다. 반성회의 회장이 되었던 곳은 해군장교들의 OB단체 수교회(水交会)(= 수교사,水交社)이다.









이치키 토시오 : "반성회는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침 저는 이곳의 가장 말석에 앉아서 대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반성회는 매달 1번, 130회 이상이 이루어졌다. 참가자는 대위부터 중장까지 많게는 40명. 나이는 대개 70~80대였다.
전쟁의 진실을 말해 남기고자, 시작했다고 한다. 의논은 매회 3시간에 이르렀다.



이치키 토시오 : "해군중에서도 제1급의 인물들만 모여있었다.
똑같은 잘못을 다음 시대에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모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합니다."




의논은 매회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되었다. 하지만 내용은 공표되지 않은채로, 해군반성회는 헤이세이 3년(=1991년)에 끝났다.









어째서 테이프를 공개하지 않은것인가?




모임의 간사를 맡았던 元 소령이 건재했다. 히라즈카 세이이치(平塚清一) 94세이다.
반성회가 시작된지 3년 뒤에 참가한 히라즈카씨는 전임 간사로부터 비공개의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히라즈카 세이이치 :
"이것은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문외불출로 하자. 그리고 자유롭게 발언하자. 인간도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것은 싫어한다,
그러니 해군에는 남겨도, 일반에는 남기지 않겠다."




테이프의 취급이 결정되지 않은채로,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죽었다.
간사였던 히라즈카씨가 테이프의 일부를 맡은채로 18년이 지났다.



히라즈카 세이이치 :
"앞으로 잘못하지 않도록, 반성회의 자료가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제3자적, 객관적으로 국민들이 해군을 바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제1회 반성회 : 쇼와 55년(=1980년) 3월 28일
최초의 해군반성회는 쇼와 55년 3월에 열렸다. 참가자는 9명. 군령부나 해군성의 요직을 역임했던, 한 때의 중령과 소장들이었다.



노모토 타메키(野元為輝) 元 소장 : "잘 부탁드립니다."
"패전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후세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군령부 작전과 사나기 사다무(佐薙毅) 元 대령
"어째서 어디가 잘못되었는가. 이것은 결과적으로 선배, 대선배, 장관이하, 혹은 군령부 총장이하 존경하는 선배들에 대해 비판,
신랄한 공격 등을 포함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다."

이후「해군반성회」는 11년간, 130회 이상이 열려, 의논을 쌓아나갔다.









곧 종전으로부터 64년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나가사키 원폭의 날. 올해 여름도 전국에서 전쟁 사망자에 대한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전후에 태어났지만, 조부는 해군에 징병되어 필리핀의 해변에서 전사하여, 유골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후 일가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수많은 생명들. 유족의 깊은 슬픔을 생각했을 때, 두 번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 전후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정부 혹은 군의 명령으로 공문서들이 불태워져버렸기 때문에 어째서 전쟁이 시작되었는지, 그 프로세스를 아는 것은 힘들어졌습니다.



이번에 우리들은, 과거 해군의 중추에 있으며 국책의 결정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남긴 육성기록을 입수했습니다. 카세트 테이프 225권, 시간으로 하면 400시간. 「해군반성회」의 의논을 녹음한 것입니다. 전직 장교들은 이 자료에서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3일간 이 테이프에 남겨진 귀중한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반성회의 테이프는 해군을 연구하고 있는 토다카 카즈시게(戸高一成)씨에 의해 보관, 수집되고 있다. 우리들은 토다카씨와 함께 참가자와 유족들을 찾아, 그 전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토다카씨가 이 자료에 주목하는 것은 참가자들의 다수가, 전쟁을 지도했던 기관 군령부(軍令部)의 참모였기 때문이었다.



토다카 : "대개 해군이라 하면 해군성과 연합함대를 생각하는데, 실은 가장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군령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군령부)의 담당자가 이 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실제 해군의 대미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동향을 알 수 있다."









대일본제국 해군은 크게 3개의 조직으로 나눠져 있다.
예산과 인사를 통괄하는 해군성(海軍省). 작전을 입안하는 군령부(軍令部).
그리고 그 작전을 바탕으로 전지에서 싸우는 함대(艦隊)이다.






군령부는 천황이 가지고 있는 군대를 지휘하는 권리. 통수권(統帥権)을 보좌하는 기관으로서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군령부 총장을 톱으로 4개의 부가 존재, 이곳에는 70명 정도의 참모가 소속되어 있었다. 군령부는 <천황직속>이라는 권위를 배경으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 군령부는 태평양전쟁 직전, 육군의 참모본부와 함께 정부에 강하게 개전을 주장했다.

한편, 정부와 해군성이 군령부의 작전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군령부는 통수권의 독립을 내세워 국가를 움직이고 있었다.









군령부는 도쿄 카스미가세키(霞が関)에 있었다.
위의 벽돌로 만든 건물에 해군성과 군령부가 들어가 있었다. 건물의 1층부터 2층까지가 해군성. 최상층인 3층이 군령부였다.
군령부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뿐.







전시중 여기서 촬영된 영상이다. 서있는 자들은 당시 가장 입학하기 어려웠다고 하는 해군병학교(海軍兵学校)를 졸업한 젊은이들.
이들 중에서 졸업시의 성적. 그후의 공적에 의해 선발된 극히 일부가 군령부에 배속되었다.







군령부 중에서도 특히 출입이 엄하게 제한되어 있었던 곳이 작전실이다. 당시의 사진을 바탕으로 재현한 모습이다. 작전실에서 군령부 1부 1과. 통칭 작전과(作戦課)에 소속된 참모들은 아시아, 태평양의 거대한 지도를 앞에 두고 작전을 짰다. 전시중, 수많은 작전이 동시진행되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방침을 결정한 것은 불과 10명 정도의 참모들이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이 방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참모는 다른 군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어깨에서 가슴까지 오는 식서(飾緒,쇼쿠쵸) = 참모식서라고 불리는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최대 240만명의 해군 군인의 목숨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반성회에는 이 사진에 찍혀있는 당시, 사나기 사다무(佐薙 毅) 중령과 미요 카즈나리(三代一就) 중령이 참가하고 있었다.
두사람은 군령부가 어떻게 개전을 결단하게 되었는지, 그 내부의 사정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10회 반성회. 쇼와 56년(=1981년) 1월 30일.



반성회가 시작된지 10개월이 지났던 이 날, 멤버는 개전에 이르기까지의 내막을, 처음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작전과 사나기 사다무 元 중령. 그는 전후에는 자위대에 들어가, 항공막료장(航空幕僚長)을 지냈던 인물이다. 해전의 1년전, 중령이었던 사나기 사다무 참모는 군령부 작전과에 배속되었다. 작전이 미리 준비되었던 것이 아니라, 일이 진행되어 가면서 조금씩 결정되어갔던 실태를 이야기한다.




사나기 : "정말로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철저하게 밝혀내고, 어느정도의 리스크가 있더라도 덤비는 것은 당연하지만, 군령부에 근무했거나, 해군성에 근무했던 높은 분들이 있어서, 충분히 그들이 일본 작전계획의 근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러한 것(=작전계획)은 정말로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점점 기세에만 휩쓸려 갔다."



일본의 자위대에서 대장(大将)은 통합막료장, 육상막료장, 해상막료장, 항공막료장 4명 뿐이다. 항공막료장은 항공방위행정에 대해 최고의 전문적조언자로서 방위대신을 보좌. 통합막료장(=육해공자위관 최고위직)이 항공자위관에 착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공자위관 중에서는 최고위직에 해당한다.







개전 4개월 전, 군령부는 미국과의 전쟁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석유가 나날이 줄어들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조급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쇼와 16년(=1941년) 7월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군을 진주시킨다. 이미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일본은 더욱 더 세력확장에 나섰던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일본이 중국에서 퇴각해야 된다고 주장. 1941년 8월, 일본에 석유수출을 금지하는 경제제재를 발동한다.









군령부는 석유가 줄어들어, 끝내는 전함과 전투기를 움직일 수 없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한편 해군성은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에 신중했다.


당시 해군성에서 병비국장으로, 함대에의 보급을 통괄하고 있었던 호시나 젠시로(保科善四郎) 元 중장. 전후에는 중의원의원을 4기 임했던 인물이다. 당시 군령부의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작전에 놀라, 개전을 반대했다고 한다.



호시나 젠시로 : "내가 병비국장(兵備局長)을 맡고 있어서, 조사를 해보니까. 도저히 출사(출병) 준비 같은건 꿈같은 소리였어.
작문(作文)은 돼있었어, 계획만. 거기에 사용할 수도 없는 병기까지 올려놓은거야, 장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



호시나 중장은 함께 대신을 설득하기 위해,
군비를 통괄하는 군무국장(軍務局長) 오카 타다즈미(岡敬純)에게 자가담판을 지으러 갔다.



호시나 젠시로 : "도저히 이런 군비로는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몇번이고 입이 닳도록 (군무국장인) 오카(=오카 타다즈미)씨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가서 대신을 설득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군무국장인) 내가 가서 말해도 내 힘으로는 이 이상 어떻게 할수가 없으니까, 자네가 말하게. 이렇게 말했다."




많은 장교들은 미국과의 전쟁에 불안을 품고 있었지만, 조기개전을 주장하는 군령부에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군령부는 개전을 결단한 것일까.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대장은 진주만 공격 4개월 전에 쇼와 천황(昭和天皇)에게 "이렇게 된 이상, 공격할 수 밖에 없다"라고 개전을 진언했다.








군령부 작전과의 미요 카즈나리 중령은 훗날 군령부, 나가노 총장으로부터 이러한 개전의 진의에 대해 듣게 되었다.



미요 카즈나리 : "어째서 당신(=나가노 총장)은 전쟁에 찬성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느냐라고 물으니,
만약 해군이 전쟁은 불가능하다고 반대했다면, 우익과 육군이 이에 대해 내란을 일으킬거라고 말하더라고."







쇼와 12년 ~ 중일전쟁. 당시 육군은 중국과의 전쟁으로 수십만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었으며, 이제와서 퇴각할 수는 없다고 주장. 토조 히데키(東條英機) 중장 (당시) 육군대신은 "퇴각하면 육군은 엉망진창이 된다, 통제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미요 카즈나리 : "(육군이) 내란을 일으키면 인원수상, 해군이 이길 수 없고, 몇개월 뒤에는 진정되고 (패해서),
결국 그런 녀석들, 우익의 내각이 생겨버리게 된다. 시기를 잃은 일본으로서는 불리한 시기에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전쟁을 하지 않을수 밖에 없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을 때 해야된다.
라는 것이 나(=나가노 총장)의 생각이라고."



나가노 총장은 육군의 내란, 쿠데타로 인해 해군이 육군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군령부 나가노 총장이 태평양 전쟁 개전을 결단한 것은 해군이라는 조직을 육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해군반성회의 전직 참모들은 이날 더 이상, 태평양 전쟁의 대의(大義)인 "자존자위(自存自衛), 아시아의 해방" 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전쟁중, 군령부의 작전실행을 위해, 남태평양에에서 싸웠던 元 소령. 그는 전선에서 쓰러진 전우의 마음을 호소했다.



元 소령 :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말로 일본의 자존자위를 위해서, 일본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생각으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게 아니었던가요."



군령부 元 대령 : "그랬다면 매우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게 아니니까 문제가 되는거지요."



元 소령 : "아무런 계획도, 승산도 없이, 명의(名義)도 없는 강도침략전쟁을 한게 사실인가요. 우리들은 그것을 인정하는건가요?"



군령부 元 대령 : "전쟁을 해도 질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육군의) 내란을 두려워해서 그런(전쟁을 시작한)거고, 내란을 일으키려고하는 녀석들(육군)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거야."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라고, 호시나 젠시로 元 중장은 주장했다.


호시나 젠시로 : "군령부는 내란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내란이 일어나도 해군이 반대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만큼의 사람을 죽여가면서 전쟁을 하는 것보다, (육군에게) 약간 양보를 하는 것이. 그런 것이 부족했던 것은 반성해야 될 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군령부의 주장대로, 전쟁으로 방향을 잡은 일본. 개전에 이르기까지 군령부는 어떠한 식으로 강대한 권력을 손에 넣어갔을까.


제46회 해군반성회, 쇼와 58년(=1983년) 9월 14일.
반성회의 시작으로부터 3년 반. 전쟁중 최전선에서 싸웠던 元 소장이 의논의 첫머리를 끊었다.



노모토 타메키(野元為輝) 元 소장.

군령부에서의 근무경험은 없고, 항공모함 즈이카쿠(瑞鶴)의 함장으로서 남태평양에서 싸운 인물이다.
그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던, 군령부와 황족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노모토 타메키 : "나가노(=나가노 오사미), 시마다(=시마다 시게타로) 양 대장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매우 비판의 범위가 좁다.
히로야스왕(博恭王)이 9년간이나 군령부 총장을 지냈다.
그런건 아무리 봐도 묘한 인사(人事)다. 그저 전하가 한마디만 하면 다들「네(=하이)」."








노모토 元 소장이 말한 전하라는 것은,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伏見宮博恭) 원수를 가리킨다. 러일전쟁에도 종군한 해군의 영웅이다. 쇼와 천황보다 26세 연상으로 뜨거운 신뢰를 받은 인물이다. 쇼와 7년(=1932년)에 해군군령부장, 훗날의 군령부 총장에 취임. 그가 총장 재임중인 9년간 해군은 급속히 군비를 확장했다.



노모토 타메키 : "지나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좀 더 황실에 대한, 황족에 대한 생각에 좀 더 브레이크를 걸 분위기가 없었다는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노모토 元 소장은 쇼와 62년(=1987년)에 죽었다.


노모토 요시에(芳苗).
그녀는 반성회에 사용할 원고를 청서(清書)하면서, 시아버지를 도왔다. 노모토 소장이 반성회에 사용하기 위해서 기록한 메모이다.
후시미노미야 총장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날은, 잊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모토 요시에 :
"후시미노미야님의 이름이 나왔기에 이건 큰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어머님과 함께 미야님의 이름을 꺼내면 안되지 않냐고. 아버님께 처음으로 그때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은 여자들은 입다물고 있어라라고 하면서, 이것은 (태평양) 전쟁에 대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걸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고."



노모토 元 소장은 반성회의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이러한 반성회의 참가 멤버 중에는 후시미노미야 총장의 측근도 있었다.










후시미노미야 총장 부관, 스에쿠니 마사오(末国正雄) 元 대령. 그는 군령부 부관으로서 총장을 섬겼다. 하지만 스에쿠니는 후시미노미야 총장에 대해 거의 발언하지 않았다.



노모토 : "욕먹을지도 모르지만 미야님(=후시미노미야 원수)은 9년간이나 군령부 총장을 했다. 이런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스에쿠니 元 대령은 반성회에서 그저 한마디.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말을 흘렸다.



스에쿠니 : "쇼와 8년(=1933년)에 그게(=법령)이 통과했죠.
군령부의 권한을 강화하게 되는. 그게 말이지, 내가 그게 왜 강하냐고 하면, 백(back)이 다르니까. 백이 미야님이거든."



?? : "나는 그게 말이죠. 대동아전쟁의 최초 원인이 그 부근에서 나왔던게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스에쿠니씨 어떻게 생각합니까?"



스에쿠니 : "그걸(법령)을 통과시키기 위해, 미야님을 데리고 온거니까. 이건 모략(謀略)이에요."








「병력량에 관해서는 군령부총장, 이것을 기안」


스에쿠니가 군령부가 모략으로 통과시켰다고 말한 법령. 그 법령은 1933년 군령부의 권한을 강화시킨 법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때부터 군함의 수와, 장비 등의 병력량 결정이 해군성에서 군령부의 주도로 바뀌게 된다.









군령부는 당시 영미와의 군축조약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군축조약으로 보유하는 군함의 수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병력량 결정의 조약 체결은 정부와 해군성이 주도한 것이다. 이에, 군령부는 병력량의 결정을 통수권에 포함시켜 군비를 확장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이러한 법 개정과 후시미노미야 총장의 관계가 반성회에서 밝혀지는 일은 없었다.









스에쿠니 대령이 말한 모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방위성 방위연구소. 여기에 그 의문을 풀 단서가 남겨져 있었다. 해군의 극비문서「군령부령개정의 경위(軍令部令改正の経緯)」.
군령부가 법령을 통과시킨 내막을 당시 해군성의 과장이 증언하고 있었다. "대신에게「이 안이 통과하지 않으면 XX가 OO을 그만둔다」라고 말을 들었다." 취재진이 취재를 진행해나가자, XX로 가린 것은 후시미노미야 전하, OO는 해군군령부장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군령부는 후시미노미야 원수의 사임을 살며시 들먹이면서, 해군성이 개정을 인정하도록 몰아넣은 것이다.









하지만 쇼와천황은 법령의 개정이 군령부의 권한확대에 이어진다고, 강한 괘념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번 취재에서 입수한 해군성의 극비자료철.
개정의 허락을 요구하는 해군대신에게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천황의 모습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폐하는 군령부의 권한이 확장되는 결과, 군령부가 멋대로 외국에 병사를 파견하려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폐하의 얼굴색이 매우「시리어스」하였다."







이에 해군대신 오오스미 미네오(大角岑生)는 군령부와 해군성의 권한에 큰 변경은 없다고 설명. 결국 천황은 개정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천황이 괘념했던 군령부의 폭주는 현실이 되었다.









쇼와 9년(=1934년) 후시미노미야 총장은 천황에게 군축체제의 탈퇴를 진언한다. 그 이후, 미국, 영국과의 군축조약은 갱신되지 않았다. 군축체제라는 족쇄가 없어진 해군은 전함 야마토(大和)의 건조 등 군비확대를 급속히 진행시킨다. 군령부의 의향에 국가가 끌려간 결과, 미국, 영국과의 대립은 매우 심각하게 되었다.







반성회에서 후시미노미야 총장에 집착했던 노모토 소장.
그는 군사력과 황족의 권위가 맺어져 있었던 사실은 반성해야할 점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었다.


노모토 타메키 소장 : "이것은 우리들의 반성이며, (후시미노미야) 전하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겠지만,
장래의 일본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 (해군) 반성회의 큰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래 군령부는 군사상 필요한 작전계획을 입안하는 섹션으로, 정치와는 일선을 달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족을 총장을 맞이해, '군축체제에서의 탈퇴' 라는 정치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정치에의 개입은 점차 에스컬레이트되어, 끝내는 국가를 움직이는 강대한 권력을 손에 넣게된다. 그 상징적인 존재와 반성회의 멤버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 1940년에 설립된「제1위원회(第一委員会)」라는 특별한 조직이다.


제1위원회는 군령부의 작전과에서 열렸다고 한다. 국가총력전준비의 중추기관으로 위치되었다.
개전 반년전, 제일위원회는「현정세하에 있어 제국해군이 취해야할 태도」라고 이름 붙인 보고서를 완성한다.


일본의 자존상 어떨 수 없는 경우에는,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석유 등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해야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무력행사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대해 석유의 공급을 금지할 경우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 후의 일본은 마치 제1위원회의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것처럼 개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1위원회의 사람들은 어떠한 생각으로 이 보고서를 쓴 것일까.



반성회의 의논, 그리고 취재로부터 떠오른 것은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목숨을 돌보지 않게 된 조직의 모습이었다.








제111회 해군반성회 : 헤이세이 원년(=1989년) 4월 24일
시대가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넘어간 해, 반성회는 해군이 전쟁에 돌입하게 된 책임을 다시 묻기 위해, 제1위원회를 검증했습니다.


토리스 켄노스케(鳥巣健之助) 元 중령

토리스 켄노스케 : "<현정세하에 있어 제국해군이 취해야할 태도(現情勢下に於いて帝国海軍の執るべき態度)> 라는 문장을 만들었어. 요약하면 연료도 어떻게든 됩니다, 배도 어떻게든 됩니다. 요는 억지로 전쟁으로 이끌어가는 작문을 만들어놓은거야."







해사국방정책위원회제일위원회(海事国防政策委員会第一委員会) (통칭 제1위원회)


제1위원회에는 군령부과 해군성에서 추려낸 중령과 대령이 모여있었습니다.
멤버는 군령부 작전과장 토미오카 사다토시(富岡定俊) 대령, 군령부 작전과 갑부원(軍令部甲部員) 오오노 타케지(大野竹二 ) 대령,
해군성 군무국 제1과장 타카다 토시타네(高田利種) 대령, 군무국 제2과장 이시카와 신고(石川信吾) 대령 등 7명입니다.


(이외의 멤버로는 간사 역할로 시바 카츠오(柴勝男,군무국 제2과 국원), 후지이 시게루(藤井茂, 군무국 제2과 국원),
오노다 스테지로(小野田捨次郎,군령부 작전과)의 3명의 중령이 배속되었다.)


본래 작전을 짜는 것이 임무인 군령부원이 육군 및 정부관계자들과 연계하여, 정치에의 영향력을 강하게 키워나가고 있었다.








제1위원회가 설립된 당시, (군령부) 후시미노미야 총장의 부관이었던
스에쿠니 (마사오) 대령은 제1위원회의 멤버가 조직의 룰을 무시하고, 잇달이 결재를 얻어나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후시미노미야 총장 부관, 스에쿠니 마사오 元 대령.



스에쿠니 마사오 : "강제적으로 도장을 찍게했다. 차장이 도장을 안찍는다고 하면, 차장을 뛰어넘어 총장에게 가져가 도장을 찍었다. (제1위원회의) 일부 사람은 육군과 통모(通謀)해서 정치를 가지고 노는 것에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애송이들, 중령, 소령 혹은 대령 정도 되는 애송이들에게 그런 것(=정치)를 시키게 만든 제도를 만들었다. 이것에 문제가 있었다."







쇼와 16년(=1941년) 4월 9일 군사참의관 나가노 오사미 대장이 군령부 총장으로 진급되었다. 1941년 4월, 새로이 군령부 총장의 자리에 앉게 된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대장. 이로부터 3개월 뒤, 그는 천황에게 개전을 진언한다.이 진언의 계기가 된 것이, 제1위원회의 보고서라고 군령부의 사나기 대령은 지적한다.









군령부 작전과 사나기 사다무 元 대령



사나기 사다무 : "(나가노) 군령부 총장은「매우 잘 공부하였다」라고 하면서, 이걸(=제1위원회의 보고서)를 그대로 믿어버렸다.
제1위원회의 자료가 나온 이후, 나가노 총장의 언동이 더욱 강경해졌다.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제1위원회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제37회 해군반성회 : 쇼와 57년 12월 22일.
반성회는 진위를 밝혀내기 위해, 위원회 멤버 중 한명을 한번 불러들였다. 당시 제1위원회의 타카다 토시타네 대령, 훗날의 소장이다. 1982년 12월 22일, 타카다 토시타네 元 소장은 반성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타카다 토시타네 (高田利種) 元 소장. (제1위원회 소속 당시는 해군성 군무국 제1과장.)



타카다 토시타네 : "해군부내에서 전쟁에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 그런 것들은 잊어버렸다
일본 해군 내에서 미일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길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는 모른다."



노모토 타메키 : "제1위원회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은 바로는 매우 평판이 나쁘다.
당신도 그 멤버였으니 꽤 이야기를 듣기는 힘들겠지만."



타카다 토시타네 : "제1위원회에 타카다 토시타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결코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런 점에 대해선."
"이것은 세계의 대세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주사변에서부터 큰 돌이 언덕을 굴러떨어져 내려온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으로서는."



타카다 소장은 제1위원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 그가 해군반성회에 출석하는 일은 없었다.








제1위원회에 대한 자료는 현재 거의 남아있질 않다. 하지만 전후 해군관계자가 위원회의 멤버에게 인터뷰를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타카다 元 소장은 그 인터뷰에서 전쟁에의 준비가 코앞에 들이닥친 당시의 의도에 대해 증언했다.


타카다 토시타네 소장 : "그건 말이지. 델리케이트했지. 예산획득의 문제가 있었지. 국책이 결정되면 오오쿠라쇼(大蔵省) 같은데서 점점 돈을 주니까. 그게 국책으로 결정되면, 임시군사비로 펑펑 들어오거든, 그럼 좋아하는 준비를 막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당시) 해군의 심리상태는 매우 복잡했지. 사실은 미일교섭 타결하고 싶다. 전쟁하지 않고, 매듭을 짓고 싶다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해군이 기개가 없다라니 뭐라니 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고.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그랬지."



미국과의 대립을 부추기면서, 군사예산을 가능한한 획득. 예산획득 후에는 미국과 타협한다.
이것이 목적이었다.






개전의 해, 해군은 전년의 배 이상의 군사예산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 국민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과 맞바꾼 것이었다.



타카다 토시타네 : "그러니까 말이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것보다. 사실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지.
하지만 자신들은 국부(局部)에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장래 같은건) 윗사람이 결정해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시 방송) "제국 육해군은 1941년 12월 8일 미명, 서태평양에서 영미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갔다."



해군이 시작을 끊은 태평양 전쟁, 미국과의 전쟁. 스스로 부추긴 대립이 예상을 뛰어넘어 에스컬레이트한 결과였다.
하지만, 군령부 작전과는 장기적 작전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고 반성회에서 고백했다.




군령부 작전과(=1부 1과) 사나기 사다무 元 대령



"군령부 1과의 정원은 평시 정원 그대로였다. 평상시 정원인채로 전쟁이 바빠지니까, 특히 육군과의 절충(折衝)이 빈번하게 있었다. 그렇게 되니 작전부대와의 교섭, 그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었고, 혹은 전쟁터에의 출장도 있었다."



작전과 미요 카즈나리 元 대령

"나는 말이죠, 항공군비와 작전계획 양쪽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것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군령부 2과의 부원도 겸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제12과(=해상교통보호 등)이 생겨나서 여기에도 항공이 필요하게 되니까,
미요군 하나 더 맡아주지 않겠나 하고 요청이 들어왔어요. 아니요, 저는 더이상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맡아달라고 하세요 라고 말하니, 이름만이어도 괜찮다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결국, 이름만 올려버렸다."



사나기 사다무 : "작전이 시작되고부터 일상 업무에 상당히 쫓기었다. 해군 군령부에는 장기적 계획을 냉정하게 연구할 스탭(=참모)이 없었다."





이러한 불안정 요소는 개전 반년 후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해전. 쇼와 17년 6월. 하와이의 제도 미드웨이에서 일어난 해전이다. 이 싸움에서 해군은 항공모함 4척, 베테랑 파일럿 등 3000명을 잃었고, 일본이 패전의 내리막길을 내려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미드웨이 작전을 입안한 것은 연합함대였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일본해군이 우세할 때, 미국해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고 했다.
군령부는 이 작전을 위험하다고 판단했지만, 연합함대를 설득할 별도의 작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미드웨이 작전의 실행에 결정타가 된 것은 군사상의 이유가 아니라, 해군수뇌끼리의 인간관계라고 한다.






미요 카즈나리 : "연합함대장관의 의견에 대해서는 매우 반론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나가노) 총장이 야마모토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번 시켜보자라고 말했다. 그렇게 (미드웨이 작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진주만 작전이 성공했으니까. 그러냐, 그럼 야마모토한테 맡겨볼까 해서 (작전을) 결정한 것이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서 울어버렸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미드웨이 작전을 하면 큰일난다 라고 말하면서 울어버렸다."








병사의 목숨을 맡고 있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무책임한 결단을 내리고 있었던 군령부. 미드웨이 작전에 참가했던 잠수함 부대의 참모가 목소리를 높였다. 준비기간을 충분히 두지 않고, 작전을 강행해 3000명의 희생자를 낸 그 책임을 물은 것이다.



제3잠수전대 元 참모 : "하여튼 항공함대와, 잠수함대도 (미드웨이 작전을) 연기시켜달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선 어떻습니까?" (미드웨이 작전을) 1개월 연기시켜 달라는 말이에요. 군령부 일부가 어느정도 연구를 하고 있었나요?"



군령부 작전과 미요 카즈나리 :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적어도 반개월 정도를 연기해야 된다고"



제3잠수전대 元 참모 : "당신은 말이죠,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몰랐던거에요. 몰랐으니까 그렇게 된거 아닙니까."



미요 카즈나리 : "연합함대에 말했어"



제3잠수전대 元 참모 : "그래서는 안되죠. 그저 그렇게 말하는 정도로는 안되요. 진짜로 그걸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는 못했죠. 그런게 말이죠, 진짜 전선에서 실제로 싸웠던 사람처럼. 진짜 그런 마음이 속에 있었다면, 연합함대에게 (미드웨이 작전은) 안된다고 말했을거야."







당시 일본의 뉴스 : "우리의 해군항공부대. 그 굉굉한 폭음은 태평양을 너머 미국을 놀라게했고, 인도양을 제압해 영국을 끝없는 절망에 몰아넣었다."


군령부는 미드웨이 작전이 패배로 끝나,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것을 국민에게 전하지 않았다. 작전을 인정한 군령부, 실행한 연합함대.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후 해군은 패배를 거듭해, 태평양의 제해권을 잃었다. 태평양의 섬들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남겨져, 아사(餓死)와 옥쇄(玉碎)가 잇달았다.






??(1) : "당신은 전쟁에서 이길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군령부 사나기 元 대령 : "그건 몰라요."



??(1) : "하지만 이길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죠?"



사나기 사다무 : "이길 생각으로 했지요. 이길 수 있다면 (전쟁에) 나는 찬성했을거란 말이죠."



??(2) : "나는 말이죠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 : "당신은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질거라고, 나가노 총장을 움직일 만큼의 노력을 얼마나 했는가."



미요 카즈나리 : "내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과장이 부장에게 (전쟁하면 반드시 질거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로서는 그 이상으로 총장에게까지 이야기를 하기까지는 (좌중 웃음소리)"



?? : "그야 그렇죠. 그런게 당신(자신)으로서는 꽤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래요 그랬었겠지요. 매우 안타깝네요. (좌중 웃음소리)"



패전이 결정적이게 된 상황에서도 일본은 전쟁을 그만두지 않았고, 해군은 젊은 병사들을 특공대(=카미카제 특공대)로 계속 보냈다.










각각 자신들의 일에만 매몰되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보이지 않게 된 (일본 해군의) 장교들. 그들의 자세는「해군은 있지만, 국가는 없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그들의 내향적 자세는 전후에도 계속되어, 해군 반성회의 前 장교들은 (반성회의) 기록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에는 주저함을 느낍니다.



수직적 관계의 섹셔널리즘,
문제를 은폐하는 체질,
상황과 흐름에 휩쓸려 문제를 말할 수 없게 된 분위기, 책임의 애매함.



전직 장교들이 고백한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프로세스)은 지금의 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 그 자체이기도 하며, 제 자신도 그러한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장교들은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반성회를 시작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말을 진정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많은 희생자를 낸, 이 나라.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덧글

  • 암흑요정 2014/05/29 23:30 # 답글

    다큐멘타리에서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데, 실제의 현 일본 정부의 모습은 그 책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 진냥 2014/05/29 23:32 # 답글

    ...이런 저런 서적을 주워읽으면서, 근대 일본의 폭주하게 된 까닭이 천황 중심 체제와 근대 국가 간의 괴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지만....
    역시 직접 겪어본 당사자들은 타인이 책망할 것도 없이 누구보다도 잘 아는군요.
    이 뚜렷한 의식을 보편적으로 이어갈 수 없는 점이 현재 일본의 큰 문제가 아닐는지... 그런 기분이 듭니다.
  • NET진보 2014/05/30 02:09 # 답글

    당시 일본 제국 해군과 육군의갈등... 육군의 삽질이나.....육군 해군내부에도... 이런저런 다양한 파벌이있었다고들엇지만..먼산..저렇게 누구도 저관성을 막지못했다고하는게;;더 비극이군요..뭐 덕분에 울나라는 독립한 기회도 되기도햇지만...
  • 함부르거 2014/05/30 08:40 # 답글

    해군이 더 질이 나쁘네요. 육군은 일선의 또라이 몇몇이 일을 키워서 다들 말려 들어갔다면 해군은 알 거 다 아는 최고의 엘리트들이 다 알면서도 지들 조직 이기주의로 일을 벌렸으니...
  • Real 2014/05/30 18:11 # 답글

    결국 조직을 위해서 나라가 어찌되던 말던 상관없었던 당시 일본군의 현실을 보여주었네요.
  • 지나가던과객 2014/05/30 19:51 # 삭제 답글

    어르신들이 왜 전쟁에 패했는지 반성해서 기록을 남겼더니, 후손들은 '위대한 대일본제국'을 다시 재현하기 위해 같은 짓을 반복할려고하고 있는 상황.
  • ?? 2014/05/30 23:30 # 삭제

    일본과 미국의
    거대 군수.금융기업이
    저들을 배후에서 지원.조종 하고있는건
    아시나요?
  • ??? 2014/05/30 23:39 # 삭제

    일본의 정.제계 거물들이
    인맥으로 뭉쳐진 하나의 핏줄이나 다름없다고
    히로세 다카시란 저널리스트가
    말하더군요
  • 대공 2014/05/30 23:44 #

    차라리 그 뒤에 프리메이슨이 있다는게 더 그럴듯 하겠네요
  • 존다리안 2014/05/30 20:22 # 답글

    소수의 (자칭) 엘리트들이 지들멋대로 나라를 굴리면 어찌 되는지 보여주는 실례 ㅜㅜ
  • 해색주 2014/05/30 20:58 # 답글

    한국군에도 6.25.에서 왜 그렇게 초반에 밀렸는지에 대한 이런 고민이 있었나요?
  • 2014/05/31 00:09 # 삭제

    그건 이미 작살나게 나왔..
  • heinkel111 2014/05/30 21:29 # 답글

    슈퍼엘리트 관료주의가 어떻게 국가를 말아먹는지 참 여러가지 사례가 있었지만 일본의 사례는 정말..
  • 셰이크 2014/05/30 21:57 # 답글

    딱 세마디로 요약하면, "질수업뜸""어? 어...어!""미국을 공격한다"
  • 3인칭관찰자 2014/05/30 22:54 # 답글

    이 반성회를 세상에 공개할 용기를 내신 분께 박수를 보내면서, 번역해주신 각시수련님께 감사드립니다.
  • 제르진스키 2014/05/31 09:53 # 삭제 답글

    한국에선 힘들죠. 6.25 반성회 하자면, 이놈 저놈 제 조상 욕했다 고소고발에 쌍방간 테러까지 진흙탕 아수라로 변할게 뻔한데..

    족보와 혈연이 이성과 사상을 압도하는 한국에선 좀처럼 반성이나 지적이 힘이 들어요..'반성 = 멸문지화'라는 조선식 연좌제가 여전히 지배하는 사회인지라..
  • mrvica 2014/05/31 13:36 #

    대한민국이 왜 반성회를 하죠? 북조선에 김일성이 반성회를 하면 몰라도...
    그리고 이미 이승만은 욕을 욕대로 다 쳐먹었는데 뭘 반성회를합니까.
  • ㅇㅇㅇ 2015/12/19 17:54 # 삭제

    희대의 개소리네요 ㅋㅋㅋㅋ 과거 정치인이나 군 통수권자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한국이 일본보다 낫습니다. 오죽하면 제5공화국이 일본으로 수출되었을때 일본인들이 전직 정치인을 저렇게 다룰수 있는건 일본에선 무리- 라고 했었을까요. 조상욕했다 지롤하는건 코에이 신장의 야망 무장 능력치가지고 우리 조상은 그렇지 않다 진흙탕 만드는 일본도 마찬가집니다
  • Ithilien 2014/05/31 16:59 # 답글

    지금까지 해군성/육군성에 권한이 집약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상상이상으로 더 괴이한 구조였군요..
    재미있고 유익한글 감사합니다.
  • 레지스탕스 2014/06/18 20:12 # 삭제 답글

    자막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보고 싶었던 다큐인데요.

    이 자막을 영상에 입혀 주실 대단한 분도 찾습니다.. 이런 다큐는 정말 필요한 다큐죠 ,,
  • 99 2014/06/23 01:29 # 삭제 답글

    반도입장에서는 레알 아리가또였넹.

    다행인건 섬나라는 저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반도도 마찬가지.어?!
  • 머위병 2016/04/28 10:29 # 삭제 답글

    2화도 있나요?
  • 각시수련 2016/04/28 13:42 #

    3부작 2화, 3화까지 있음. 2화가 특공 자폭병기, 카미카제. 3화가 전범재판
  • 호옹이 2016/12/08 09:00 # 삭제 답글

    덕분에 1부 영상 잘봤습니다~ 마지막에 장교들이 웃으면서 말하는게 좀 소름돋네요 허허허
    혹시 2,3부는 영상만이라도 올릴 생각은 없으신가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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