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화 히스토리아 : 오이란의 진실, 에도 요시와라 유곽의 빛과 그림자 영상문화생활



역사비화 히스토리아 - 오이란의 진실, 에도 요시와라 유곽의 빛과 그림자

2주 전에 역사비화 세이 쇼나곤 편을 봤는데, 그건 꽤 좋았음. 2ch의 NHK 실황스레 반응도 좋았고.
내가 웬만해서 눈물이 안나는 사람인데 눈물이 나올뻔한 상태 + 막판 백합드립에는 키마시타와(キマシタワー)를 세웠다 ㅋㅋ 
이거시 진짜 참된 주종간의 백합 ㅠㅠㅠ

그래서 지난주 방송인 히데요시가 사랑한 교토 편도 보고 뭐 재밌는게 없을까 싶어서 본 요시와라 유곽의 오이란 편.
요시와라 유곽에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꽤 있어, 이하 방송내용을 정리해보았다.

歴史秘話 ヒストリア 名作選 : 花魁の真実 江戸・吉原遊郭の光と影
이하 2013년 11월 27일 방영분 내용 (= 2013년 1월 23일 방영분의 재방송이다.)


오이란(花魁)은 에도 요시와라 유곽에서 특별히 가격이 비싼 유녀를 가리키는 말.
그리고 이러한 오이란이 함께하는 자들을 데리고, 유곽을 걷는 오이란 도츄(花魁道中)는 요시와라의 명물.

이때 오이란은 8자 형태를 그리면서 독특하게 걸었는데, 두꺼운 기모노에, 우치카케(打掛)
머리에는 칸자시(비녀,簪)를 20개 이상이나 꽂았는데, 총중량은 20kg. 그야말로 쌀 한포대를 들고 거리를 걷는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에서도 인기가 많은 오이란인데, 당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


텐메이부터 칸세이까지(天明~寛政期,1781~1801)
18세기 후반 에도의 3대 스타를 그린 우키요에인 카츠카와 슌코(勝川春好)의「에도 산부쿠츠이(江戸三幅対)」란 작품이 있다.
여기에는 가부키의 대스타 이치카와 단쥬로(市川団十郎)
스모의 요코즈나 타니카제(谷風, 그는 생애 승률이 9할 5푼이여서 무적의 요코즈나라고 불렸다)와
오우기야(扇屋)의 오이란 하나오기(花扇)가 그려져있다.

캬, 그야말로 3S정책 돋았던 에도막부 시대. 섹스(Sex). 스포츠(Sports), 스크린(Screen)
이렇게 모든 것을 상품화해서 민중들의 만족시키고,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했으니, 에도 막부가 그나마 오래간거겠지 ㅋㅋ

어쨌든 저렇게 당시 시대의 스타로서 대접을 받았던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 오이란의 세계에 대해 알아보자.


에도일목도병풍 (江戸一目図屏風,에도히토메즈뵤후)
1603년 에도막부 창설 이후, 1617년에 구 요시와라가 생겨난다. 원래 니혼바시 쪽에 위치해 있었지만, 1657년에 대화재로 소실된다.
이후 확장된 에도의 시가지를 피해 논밭이었던 아사쿠사 쪽으로 이전된다. 그게 바로 신 요시와라. (줄여서 요시와라.)


에도의 요시와라 유곽(吉原遊廓), 에돗코(에도 토박이)도 그렇지 않은 자도 평생에 한번 쯤은 가보고 싶다고 두근거렸던 그곳.

요시와라는 에도시대 초기에 막부가 공인한 유곽으로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에도성에 가까운 시가지에 있었지만, 에도의 급속도 발전으로 인해서 17세기 중엽에 도시 외곽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전 이후부터는 신요시와라(新吉原)라고도 불리게 된다. (현 도쿄 다이토구 센소지 뒤의 니혼 즈츠미에 위치했다.)

일본 3대 유곽 : 오사카의 신마치 유곽(新町遊廓), 교토의 시마바라 유곽(島原遊廓), 에도의 요시와라 유곽(吉原遊廓).
참고로 유곽은 아니지만, 현재 일본에서 가장 밤문화가 발달한 3대 환락가
가부키쵸(歌舞伎町, 도쿄도 신주쿠), 스스키노(ススキノ, 홋카이도 삿포로시), 나카스(中洲, 큐슈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이다.

아사쿠사의 논밭에 갑자기 생겨난 별세계. 크기는 2만평(坪,츠보). 당시 일본 전국에 있었던 유곽 중에서도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다.
주위에는 미조(溝)를 파서 침입자와 내부의 탈주자를 막았는데, 그야말로 성이라고 불릴 정도.




출입구는 정면에 있는 요시와라 대문(吉原大門)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이 대문을 지나가면 고하를 막론하고 유녀의 일개 손님.
때문에 신분이 높아도 가마(駕籠)는 출입할 수 없었고, 무사들은 칼을 맡기고 출입했다.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오이란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저 돈만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긴 과정이 필요하다.

먼저 히키테차야(引手茶屋)라는 곳에 들러야 된다. 요시와라를 찾은 손님은 여기서 오이란을 소개 받아야한다.
그리고 차야에서는 지갑을 맡겨야한다. 왜냐하면 요시와라는 꿈의 장소, 돈이라는 현실적인 것은 먼저 잊어라는 소리이다.
그럼 차야에서는 손님을 잘 살펴보고, 손님에게 맞는 오이란을 소개해준다.


오이란이 있는 큰 가게는, 대개 100명 이상의 종업원이 일을 했다고 한다.


첫번째 만남 초회(初会)

손님은 2층에 있는 히키츠케베야(引付部屋)라고 불리는 연회장에서 중개받게 되는 오이란을 기다리게 된다.
이렇게 오이란과 처음 만나게 되는 날을 초회(初会)라고 한다.
고객은 오이란을 맞이하기 위해서 태고 연주자나 게이샤 등를 불러서 연회를 열어야 된다.

이때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시모자(下座,하좌)에 앉아, 오이란이 앉을 상석인 카미자(上座,상좌)를 비워두고 기다린다.
그렇게 하면 오이란이 들어오는데, 이때 오이란은 손님에게 말도 걸지않고 그냥 살펴보기만 한다.
사실 오이란에게는 손님을 고를 권리가 있다. 첫날인 초회는 바로 오이란이 손님이 자신에게 맞는 사람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수일 뒤, 손님은 다시 오이란을 찾아가야 한다.

이렇게 오이란과의 두번째 만남을 우라(裏,뒤) 혹은 뒤를 뒤집는다(裏を返す,우라오카에스) 라고 하는데,
초회와 마찬가지로 연회를 열고 오이란을 기다려야 한다.

이때, 오이란이 손님을 마음에 들어하면 같이 상석에 앉아서 연회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오이란은 손님의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다.




그리고 또 수일 뒤ㅋㅋㅋ (아오 니미 시팔 ㅋㅋㅋ 진짜 ㅋㅋㅋㅋ)

마침내 오이란이 손님을 마음에 들어하면, 오이란은 처음으로 유녀옥(遊女屋,유녀집)의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손님을 초대한다.
이때부터 오이란은 차가운 태도에서 일변, 연인처럼 손님을 공손하게 대접하는데,
이렇게 되면 나지미(馴染み)가 된다. 요는 같은 유녀에게 3번 이상 방문해, 오이란이 인정한 단골손님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손님에게는 특별한 것이 준비되어 있는데, 바로 고객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젓가락 주머니(하시부쿠로).
이렇게 나지미가 되면 이름을 불러주며 마치 부부처럼 대해준다. 그리고 이윽고 몸을 허락하고는, 남녀간의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요는 현대 모에 요소 중에서도 으뜸으로 취급되는 츤데레 상술 ㅋㅋ 츤츤에서 뒤를 뒤집고, 나지미가 되면 데레로 일변도.)

하지만 이렇게 오이란과 노는 것은 매우 사치스런 놀이로 오이란의 나지미가 되기 위해서는
오이란의 화대(揚げ代), 차야의 중개료, 연회비, 종업원에게의 팁 등 현재의 화폐 가치로 200만엔 정도가 들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돈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오이란의 나지미가 되면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다.
단골 이외 다른 유녀와 통하는 것은 부부의 관계를 깨고 바람을 피는 것으로 간주되어, 이 사실이 발각되면,
손님은 요시와라 대문에서 붙잡히고, 차야에는 불만이 접수된다. 그러면 손님은 위자료를 지불하고,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다른 유녀들로부터는 조롱을 받게 되고, 후리소데를 입고 여장을 해야되거나, 마게에 장난질을 당하게 되는 등
오이란의 나지미가 된 이상, 바람은 피워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요시와라에는 사랑이 있다. 즉, 사랑을 파는 곳.

이상적인 사랑, 꿈에도 그린 사랑이 연출되는 곳이 바로 요시와라 유곽.
때문에 요시와라에 있는 여러가지 규칙이나 의식 같은 것은 권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사랑을 연출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맛보게 하기 위해 정해져 있는 양식이다.





에도 요시와라에는 대략 3000명의 유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타유(太夫)나 오이란이라고 불린 격이 높은 유녀는 소수에 불과.
그야말로 수백명 중의 한명꼴이었다.

이런 오이란(花魁)에게 요구되는 것은 먼저 미모. 그리고 높은 품격과 교양이 요구되었다.
차도(茶道), 화도(花道, 꽃꽃이), 향도(香道, 향을 감상하거나 어떤 향인지 맞추는 것)
샤미센, 고토(琴,금), 우타(歌) 등의 가무 능력도 갖추어야 되고, 바둑이나 장기등의 놀이도 고객이 원하면 상대가 되어줘야 한다.

또, 와카 등의 문예에도 정통해서 스스로 우타(歌)를 불렀던 오이란도 있었다.
문예 중에서 가장 중요시 여겨지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편지를 쓰는 것.

에도시대 초기 중기, 매해 발매되었던 유녀평판기(遊女評判記) = 현대 느낌으로는 AV 여배우 카탈로그 같은 책.

즉, 유녀 각각의 특징을 써서 판매했던 책에는
양귀비 같다, 카구야 히메의 화신으로 생각 될 정도의 명군(名君, 이름 높은 유녀) 등의 어구로 표현 되었던 것이 바로 오이란.
그야말로 에도 남자들이 동경하는 이상형의 여성. 무가 히메들에 못지 않을 정도의 궁극의 재색겸비 여성이었다.

대개 오이란을 비롯해 에도 요시와라의 유녀는
일반적으로 27세에 은퇴했었는데, 그 중
오이란은
단기간에 자신을 끝없이 상품으로서 갈고 닦았던 여성들이다.

코야부 역사당 : 헤이안 시대를 살았던 여자 오타쿠의 일생

ㅋㅋㅋㅋ 유녀가 27세에 역할을 마치고 은퇴를 했다는건 여자로서의 육체적 가치는 그때 끝난다는 소린데,
이보다 700~800년 앞선 헤이안 시대에 32세까지, 집에서 겐지 모노가타리 문학 덕질하다가, 32세 생애 첫출근, 33세에 결혼을 한
오덕후 노처녀 스가와라 타카스에의 딸은 진짜 대단했었네 ㅠㅠㅠㅠ

남성들의 이상형이자, 여성들도 흉내냈던 시대의 패션 리더, 오이란. 이번에는 그 패션에 대해 살펴보자.


좌측부터 효고 마게, 카츠야마 마게, 겐로쿠 시마다 마게.


카츠야마 마게(勝山髷)

유곽의 유녀들은 자신을 가꾸어서 스스로의 몸을 파는 일이었던 만큼, 당시 패션의 리더였다.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유녀의 패션을 따라하기도 했었다.

에도시대는 머리 모양이 크게 발달했던 시대, 대략 300 종류의 머리 모양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 바탕이 되는 3개 머리 모양인
효고 마게(兵庫髷), 카츠야마 마게(勝山髷), 겐로쿠 시마다 마게(元禄島田髷)는 유녀가 유행시켰다고 한다.

그중에서 특히 카츠야마 마게는 17세기 중엽에 요시와라 유녀 카츠야마(勝山)가 만들어 유행시킨 것.
카츠야마가 저 머리를 하고 오이란 도츄를 하고 난 뒤, 에도에서 크게 평판이 일어 에도 여성들이 흉내를 내면서 유행하게 되었다.



이 카츠야마 마게에서 100년 뒤인 에도 중기에는 등롱빈(燈籠鬢)과 시마다 마게(島田髷)가 폭발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이런 마게 역시 원래는 유녀들의 헤어 스타일이었다.

이 시대가 되면 머리 모양은 점점 더 복잡화되고, 상하 뿐만 아니라 옆으로도 퍼지게 된다.
이렇게 옆으로 머리를 코디하는 것이 바로 빈(鬢,びん).

고래수염 등을 사용한 봉으로 머리를 옆으로 부풀려 안이 비춰보이게 고정시키는데, 등롱의 갓 같다고 해서 등롱빈으로 불렸다.
여기에 시마다 마게를 한 유녀의 머리 형태는, 현재 일본식 혼례 때도 신부의 머리 모양으로 볼 수 있는 머리이다.

이런 식으로 점점 복잡화된 유녀의 머리 때문에 유곽에는 여성 미용사(髪結,카미유이)라는 직종이 생겨났고,
이들이 에도의 마을에도 진출해서 유녀의 최신 헤어스타일을 서민에게도 널리 퍼트려 유행을 가속화되게 만들었다.


溪斎英泉「新造出しの図」는 한 명의 오이란이 이끄는 팀을 그린 그림.




좌측부터 후리소데 신조 / 반토 신조 / 신조에서 오이란으로 승격해 갓 데뷔한 오이란 / 베테랑 오이란.

후리소데 신조(振袖新造) : 15~16세의 견습 유녀. 카무로(禿, 10세 전후로 오이란의 심부름을 하는 소녀)가 유녀로서의 일을 하기
시작하면 후리소데 신조가 된다. 오이란을 대신해서 불려가는 일이 있어도 남자와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하지만, 몰래 손님을 받기도 했다. 후리소데 신조가 되면 격이 높은 오이란이 되는 장래를 약속 받은것과 마찬가지였다.

반토 신조(番頭新造) : 기량이 좋지 않고 거칠어서 상품이 안되는 유녀나, 베테랑 유녀가 맡았으며, 매니저 같은 역할을 했다.
오이란의 곁에서 봉사. 몰래 손님을 받기도 했다. 원래 신조(新造)는 무가나 쵸닌(町人)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훗날에는 미혼의 여성도 포함하는 말이 되었다.

차례대로 나나후네(七舟), 나나하시(七橋), 나나마사(七政), 나나하마(七濱), 나나히토(七人), 나나사토(七里) 라는 이름.
잘 살펴보면 특징이 있는데, 이들을 이끄는 오이란 나나사토(七里)의 나나(七)라는 글자를 다른 유녀들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
이외에도 나나사토의 옷에 그려진 키쿄몬(桔梗紋, 도라지 꽃무늬)을 모두 몸의 어딘가에 지니고 있다는 것.

이런 식으로 오이란들은 나나(七) 같은 한 글자와 키쿄몬 같은 심볼 마크로 자신만의 팀을 꾸렸던 것이다.
오이란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아네죠로(姉女郎)가 이모토죠로(妹女郎)들을 매니지먼트하고 육성하면서
다음 대의 오이란을 육성하는 그룹을 만들고 이끌어나갔다.

이런 유녀들의 그룹적 특징에서 오이란의 어원이 보이는데, 오이란이란 여동생분에 해당하는
죠로(女郎)들이「오이라(우리들)의 언니, おいらの姉さん」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오이란(おいらん)이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유녀는 경성(傾城)이라고도 불렸는데, 말그대로 일국의 성을 기울게 할 정도라서 유녀에게 심하게 빠진 다이묘는 막부에 의해 칩거,
강제로 영지로 돌아가게 되었고, 상인가문의 도련님들은 집안을 말아먹을 정도로 돈을 갖다 바쳤다고 한다.


요시와라가 낳은 국제적 화가, 키타가와 우타마로

이런 유녀의 매력을 남김없이 그린 사람이 우키요에 화가 키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그는 18세기 중엽에 활동, 미인화로 일세를 풍미했다. 현존하는 우키요에는 대략 2천점. 그중에서 무려 500점이 유녀를 그린 것이다.

원래 그는 마을 화가로서 그럭저럭 그림을 그리며 살았었는데,
그런 그에게 비약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유곽 요시와라를 드나들면서였다. 물론 놀러 다닌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 요시와라에서 붐이 일었던 쿄카카이(狂歌会,광가회)에 참석했었다. 이는 골계한 단가를 지어 읊으며 즐기는 모임인데,
신분제도를 초월해, 무사, 상인, 화가, 공무원, 유녀 등의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원래라면 이러한 일은 용납되지 않지만, 요시와라 유곽은 대문을 지나기만 하면 신분을 묻지 않는 세계였기 때문에
이런 신분을 초월한 문화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요시와라에서 붐이 일었던 쿄카카이(狂歌会,광가회). 요시와라는 신분을 초월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였다.


우타마로는 이런 새로운 문화를 하나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는데,
바로 쿄카와 그 소재를 그림으로 그려, 하나의 책으로 엮은 쿄카에혼(狂歌絵本)이다.

하지만 당시 막부의 로쥬(老中)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한 칸세이의 개혁(寛政の改革, 1787년~1793년)이 일어난다.
사다노부(松平定信)는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철저한 검약으로 다시 기존의 신분질서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때문에 에도의 마을은 조용해지고, 쿄카 붐은 사그라들었으며, 요시와라도 쇠퇴해져갔다.

이런 에도의 분위기를 타파한 것이 우타마로의 미인화.
칸세이의 개혁에 저항하듯이 그는 화려한 미인화를 연달이 그려내 대평판을 얻는다.
그 중에서도 개혁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요시와라 유녀들을 그릴때 그의 붓을 더욱 실력을 발휘했다.


당시의 가장 아름다운 오이란들을 그린 시리즈.「당시전성미인전(当時全盛美人揃, 토우지젠세이비진조로에)」
여기서 우타마로는 인물의 무릎에 초점을 맞추는 참신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생생한 유녀의 매력을 그린 우타마로의 시리즈도 있었다.
유녀의 24시간을 두시간 간격인 12각으로 그려낸「청루십이시 속(青楼十二時 続, 세이루 쥬니토키・츠즈키)」란 작품.


아침 8시 (辰ノ刻, 진시)




새벽녘에 손님이 돌아간 다음에 약간의 수면을 취하는 유녀. 꾸미지 않은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유녀의 한 때가 그려져 있다.






심야 2시 (丑ノ刻, 축시)

손님의 곁을 떠나 자신의 볼 일을 보러가는 유녀. 지쳤는지 안정되지 않은 발걸음. 옷은 흐트러져있고, 불은 든 손은 미덥다.
무심코 안아주고 싶어지는 무방비한 여성의 모습이다.


이렇게 유녀를 파악해서 그려내는 우타마로의 변환자재의 시선.

이것은 그가 요시와라에서 쿄카운동에 참가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우타마로에게 있어 요시와라가 가까운 존재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쿄카회의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교류햇었던 것이, 우타마로의 의식을 포함 그가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에 크게 기여했다.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도 그리지 않았던, 당시 아무나 그릴수 없는 그림을 그렸던 것.






마지막으로 카시(川岸)라고 불리는 요시와라 최하층의 유녀를 그린 그림을 살펴보자.

얼마나 늠름한 몸인가,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얼굴인가.
요시와라 유곽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최하층 유녀의 모습 등 우타마로는 그때까지 아무도 그리지 않았던,
삶의 에너지를 전신에서 뿜어내고 있는 여성들을 그림으로 그려남겼다.




에도 요시와라는 유녀를 각각의 매력 뿐만 아니라, 공간으로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많은 장치들이 있었다.
요시와라의 메인스트리트인 나카노쵸(仲之町)의 벚꽃은 남녀노소가 꽃구경을 즐기는 에도의 명물.

하지만 저런 벚꽃이 원래 그곳에 있는게 아니라, 무려 봄이 되면 활짝 핀 벚꽃나무를 가져와서 심었으며,
지기 전에 모두 뽑아버리는 놀라운 연출이 펼쳐졌다. 이외에도 1년내내 언제와도 계절의 명물을 즐길 수 있는 장치들이 있었다.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테마파크 같은 느낌의 유곽.


이렇듯 얼핏 봐서는 화려한 세계 속에 있는 유녀들. 하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다르다.
유녀들의 대부분은 빚 때문에 요시와라에 몸을 두게 된 여성들. 때문에 유녀들의 꿈은「미우케(身請け)」를 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나지미가 된 손님이 자신의 빚을 갚아주고, 그 사람의 부인이나 애인이 되어 하루빨리 유곽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도쿄 미노와의 죠칸지(浄閑寺,정한사) (三ノ輪の浄閑寺)

요시와라 유곽 근처에 있었기에, 유곽 관계자들이 많이 묻여있는 절이다. 에도시대에 재해로 죽은 유녀나
특히 요시와라 유곽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녀가 내던져지듯이 묻였다고 해서「나게코미데라(投げ込み寺)」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관동대지진과 도쿄대공습때 죽은 유녀들을 기리는 신요시와라 총령탑(新吉原総霊塔)이 있다.

이 절의 공양탑에 적혀져 있는 말은태어나서는 고통스러운 세상, 죽어서는 죠칸지 (生れては苦界, 死しては浄閑寺)」
서민부터 다이묘까지 꿈을 안고 찾아간 요시와라. 하지만 현실의 유녀들은 그속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살펴보자.


대에도 유녀 사건부

사실 에도 요시와라 유녀의 개개의 확실한 사료(일기나 편지 등)는 남아있지 않고, 많은 것이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다.
요시와라는 화재로 인해 에도시대만 해도 십수번 전소되었던 것도 그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숨겨진 유녀들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에도의 재판기록과 막부의 비밀보고서.
17세기 후반의 재판기록인 오시오키사이쿄쵸(御仕置裁許帳)의 약 900건의 판례 중에서 20건에 요시와라 유녀가 등장한다.


1. 후쿠의 경우, 죠쿄(貞享) 원년 (1684년)

하루는 11년 전에 2살짜리 딸인 후쿠를 양녀로 내보내었는데, 후쿠는 자주 생가집의 하루를 만나러 왔다.
그런데 3년 전부터 후쿠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양부인 곤에몬에게 물어도 야시키보코(屋敷奉公, 무가의 저택에서 일하는 것)에 보냈다는 등의 말로,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다.

마침내 하루는 마을 부교쇼(奉行所)에 호소했다. 부교쇼 관리가 조사해본 결과, 후쿠는 요시와라에 있다는 것이었다.
양부 곤에몬이 후쿠를 6량() 15년의 년계계약으로 유녀집에 팔았던 것이다.

곤에몬은 감옥에 갖히게 되었고, 후쿠는 실모(実母) 하루에게 거두어졌다.
막부는 멋대로 양자를 유녀로 만드는 것과 10년 이상의 고용살이(年季奉公)로 내보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 이런 판례를 봤을 때, 신 요시와라는 딸 등이 소식불명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보는 장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도시대 후반의 막부 재판기록인 오시오키루이레이슈(御仕置例類集,어사치례류집)에도 유녀가 등장한다.

2. 마츠노이의 경우, 분카(文化) 5년 (1808년)

젊은 유녀 마츠노이(松の井)는 무직인 남성 테츠고로와 나지미가 되었다.
하지만 유녀의 몸으로는 만나고 싶을때 만날 수 없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요시와라에서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마츠노이가 유녀집(遊女屋,유녀옥)의 2층에서 부엌으로 불을 던지고, 화재의 연기 속에 섞여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장 붙잡히고 말았다. 기묘하게도 마츠노이가 불을 질렀을 때, 나지미인 테츠고로는 잠을 자고 있어 이를 몰랐다고 한다.
아마도 이는 테츠고로를 감싸려는 마츠노이의 거짓진술임으로 생각되었다.

결국, 테츠고로는 도주계획을 세운것만 죄로 물어져, 테구사리(手鎖, 손에 쇠고랑을 차는 것) 50일에 처해졌고,
마츠노이는 시마나가시(島流し, 유배형)에 처하게 되었다.

- 개인적으로 저시대의 저런 이야기 진짜 좋아함 ㅠㅠㅠ


막부말 막부 로쥬가 비밀리에 모은 에도시내의 수많은 사건에 대한 보고서에도 유녀의 모습이 보인다.
마츠다이라 노리야스 (松平乗全) 관계문서 中

3. 마유즈미의 경우, 안세이 2년 (1855년)

14세의 유녀 마유즈미(黛)는 어릴적 부모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는데, 무사하다면 부디 만나고 싶다고 매일같이 빌었다.
에도에 안세이의 대지진(安政の大地震)이 일어났을 때,
마유즈미는 목숨도 건지고, 소중히 여겼던 귀한 빗(櫛,쿠시)과 비녀(簪,칸자시)를 가지고 나올수 있었다.

이때, 마유즈미는 빗과 비녀로 지진의 피해자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공덕으로 인해 양친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빗과 비녀를 팔아서,
30량 분의 세토야키(瀬戸焼)의 유키히라나베(냄비) 1160개를 구입, 피재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다들 화려한 오이란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유녀들. 하지만 그녀들이 필사적으로 살았던 흔적은 소수의 사료에 남겨져 있다.
요시와라는 문화적으로 풍부한 공간이라는 면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뒤에는 피할수 없는 현실이 있기도 했다.

에도시대에는 수많은 것들이 상품화되어갔는데,
물론 성(性)도 상품화 되었다. 그리고 그런 성 상품화의 극단에 있는 것이 바로 요시와라라는 공간.




그렇다면, 당시 에도사람들은 유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작가 산토쿄덴(山東京伝,1761~1816). 그는 가장 에돗코(= 江戸っ子, 에도 토박이)라고 불리는 작가인데,
산토쿄덴과 유녀에 대해 이런 일화가 있다.

산토쿄덴은 에도 후카가와(深川)의 전당포(質屋,시치야)에서 태어나 우키요에 화가, 작가로서 활동하면서 담뱃가게를 경영했다.
그는 생애 2번 결혼했지만, 둘 다 미우케한 유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물론 오이란 클래스가 아닌 평범한 유녀.

쿄덴은 어느날, 후배인 쿄쿠테이 바킨(曲亭馬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녀에도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 자들이 있다. 아내가 되면, 절개를 지키면서 몸가짐을 고치는 자들도 많다.
유곽에 몸을 팔게 된 것도, 부모를 위해서 혹은 형제를 위해서 그런 것이며. 그렇지 않은 자는 드물다
가족을 위한 마음이 있기에 자신의 몸을 수많은 손님들에게 맡기는 유녀를, 어찌 어여삐 여기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

쿄쿠테이 바킨의 수필 이파전모지기(伊波伝毛之記, 산토쿄덴의 전기) 中

에도 사람들은 유녀들이 무엇을 위해서 그곳에 있는지 다들 알고 있었다. 즉, 가족을 위해서였다.
교덴은 작가였던 것만큼 그런 유녀들의 이야기를 한명 한명에게서 들었기에
바깥 세상의 아가씨들 보다도, 유곽 내에서 고생을 하면서, 그럼에도 자신을 갈고 닦는 여성들에게 끌렸던 것이다.


이후 에도시대가 끝나도 요시와라 오이란의 모습은 의외의 모습으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다는 내용으로 방송은 끝을 맺는다.

근대화를 서두르는 일본 메이지의 세상, 수많은 에도 문화가 잊혀져 가는 와중에
유럽에서는 열광적인 에도 붐, 자포니즘(Japonism)이 일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논평가 에드몽 드 공쿠르가 쓴 연구서 우타마로(歌麿, Outamaro)
세계 최초로 일본의 미술가를 단독으로 다룬 책. 부제는 청루의 화가(青楼の画家, LE PEINTRE DES MAISONS VERTES)
"il fait une déesse (이는 여신이다)". 유녀를 천녀(天女,선녀)처럼 그린 그가 일본 최고의 화가 중 후보로 꼽혔다.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1822년-1896년)
그의 유서를 바탕으로 공쿠르 상(Prix Goncourt)을 창설되는데, 이는 현재 프랑스에게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이다.
참고로 세계3대 문학상은 노벨문학상(스웨덴), 맨부커상(영국), 공쿠르상(프랑스)이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의「기모노를 입은 카미유(Madame Monet en costume japonais)」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작품.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아내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그림, 그의 일본미술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반 고흐는 오이란의 우키요에를 유화로 모사했다.

……어쨌든 내 모든 작품은 일본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본 미술은 일본 자국에서는 퇴폐해졌어도,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들 사이에서 다시 그 뿌리를 박고 있구나.
내게 자연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일본 물건의 거래적인 가치보다는 예술가를 위한 그 실질적인 가치에 있단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中)

그리고 현재 일본에는 라쿠고(落語)의 이야기 속에도 살아있다. 바로 코우야 타카오(紺屋高尾) 라는 이야기.
요시와라 제일의 유녀이자, 오이란의 필두인 5대 타카오 타유(高尾太夫)와 일개 염색장인 큐조(久蔵)의 순애를 테마로 한 이야기.

타카오에 한 눈에 반한 큐조는 3년간 필사적으로 일해서 10량의 돈을 모아 요시와라에 간다.
이런 그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삼년간 피와 땀을 흘리면서, 모은 돈. 단 하룻밤에 저를 위해 쓰겠다고 하시니, 이 얼마나 인정이 두터운 분이신지요.
저 같은 여자라도 아내로 맞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ㅠㅠ 오이란이 제 아내가 되어주신다면, 더 열심히 일해서, 평생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ㅠㅠ"



역사비화 히스토리아 명작선이라고 해서 재방송으로 다시 나왔던 건데,
뭐 방송 내용은 위키피디아 같은데서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고, 오이란의 진실이라는 제목 치고는 오이란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좀 부족했던게 아쉬웠지만. (그야 개별 사료가 별로 없데잖아 ㅋㅋㅋ)

솔까말 오이란 자체에 대한건 일본위키 오이란(花魁) 항목에 들어가면 이것보다 많음.

하지만, 직접 자료와 유녀들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들으며, 단숨에 정리된 정보를 재밌고 쉽게 얻을수 있었던 점은 꽤 좋았다.
솔직히 내가 글로 정리한거보다는 직접 방송을 보면서 시청각 정보를 얻는게 백배는 더 낫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 "백견이 불여일동영상" 이다.

그냥 심심해서 정리해본건데 분량은 코야부 역사당과는 비교가 안 됨,
안 그래도 40분짜리 영상에, 이것저것 많이 소개해서 던져주니까 단순히 글로 정리하는데만 한참 걸리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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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ede 2014/04/14 08:46 # 답글

    요시와라 관련해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었군요! 사랑을 파는 곳이라는 말이 묘하게 서글프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 류진영 2014/04/14 09:17 # 답글

    좋은 정보 입니다. : )
    전에 그림 그릴때, 한창 자료 찾아보던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읽어보니 또 새롭네요.
  • Wolfwood 2014/04/14 12:36 # 답글

    음 작년에 쟈포니즘 관련해서 수업들을때 봤으면하는 물건이네요..
  • DosKeryos 2014/04/16 23:12 # 답글

    창녀+더치와이프+아이돌=오이란 이란 느낌이군요...
  • 하하 2014/06/12 20:16 # 삭제 답글

    요즘 일본문화가 더럽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위안부일도 그렇고 ..방송매체 이용해서.미화시키는것같은데요^^ 미화시키는 용도로 방송매체 잘이용하잖아요 ^^ 국제사회에서 한국문화가 일본보다 고상하다고 얘기하고 실제로 조선의 정조와 절개관념 정조를 잃으면 작은칼 이름이뭐죠?? 은단도였나 아무튼 여자들이 지니고다녔던 조선의 작은칼있잖아요 자살도 마다않던 그리고 남편이죽으면 따라죽거나 평생 정조를지키며살던 열녀도인가 남자도 학식과 덕망높고 의리 고고하고 고결한 청백리 선비정신 기생들도 정조지키고 예술과 학식중요시하던 아무튼 전 이런 고결하고 고품격 한국전통문화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긍정적인 부분은 현대에도접목시켰으면 좋겠어요 ^^
  • 푸하하 2015/06/07 19:53 # 삭제

    하하하하! 한국은 그런 류의 일에 방송매체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지(아아.. 방송매체를 통한 모종의 불순한 일의 폐해가 여기까지 미치는 것인가?)? 애초에 열녀에 대한 사례도 많은 건 아닌데요? 그런데 그렇게 정조지키고 자살하는 열녀?를 좋아하시다니... 고.품.격.한.국.전.통.성.차.별. 에 자부심을 느끼시나보군요?^^
    현대에서 그런 소리를 하거나 그런 여성을 찾는다 하시면...ㅎㅎ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는데 성별을 막론하고 유식하신 분으로는 보이지 않네요.
    뭐 그리고 기생들이 정조지킨다 하신 것 같은데... 무슨 소리랍니까? 기생집가서 주의할 8가지 점이라고 전해져내려오는게 있는데 그 중하나가 기생을 믿지 말라는겁니다.
    어떤 관리가 기생과 놀다가 다른 지방으로 가고 기생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무슨 산이 무너질 것이며 절대 다른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겠더랍니다. 그런데 가고 얼마안되서 바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단 사실이 그 관리 귀에 들어갑니다. 관리가 뭐라고 기생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기생의 답, 그렇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산이 무너졌겠습니까?(뭐 이런식의 답이었습니다.) 정조라뇨? 유교사상을 중시하는 조선인들에게 정조란 관계란 한번만 결혼전에 남성과 관계해도 깨지는 거라서ㅋㅋ 정조가 뭔지 알고나 하시는 말인지?
  • 마히 2016/02/19 05:50 # 삭제 답글

    정말 자세하고 좋은 정보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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