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으로 살펴보는 만화 장가행


 


뭐 그렇게 대단한건 아니고,

정관초를 배경으로 하는 중국만화 장가행과 이순풍이 주인공인 중드 '수사의 신 이순풍 (원제:卜案)' 을 보다가
이재민의 묘사가 자주 나오길래 태종 즉위를 전후로 당에 어떤 재해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서 사료를 찾아봤다.

역사적으로 수말당초에는 농민봉기 등으로 뭐 거의 난장판이었으며,
전란이 빈번했던건 잘 알고 있지만, 어떤 자연재해가 정확히 몇년도에 있었는지가 궁금했음.

당에 대한 기술이니, 구당서 舊唐書 , 신당서 新唐書 를 찾아봐야 하겠지만, 중국어가 후달리는 까막눈이라 
먼저 집에 있는 자치통감 資治通鑑 (사마광 지음, 권중달 국역) 이나 살펴보았다.
중국 위키피디아를 보니까 수말당초 인물들 항목의 참고문헌에 자치통감이 자주 들어가 있었던게 두번째 이유.

사랑해요 국역 완역본 ㅠㅠㅠ

기왕 자치통감 살펴보는 김에 만화 장가행 속에 나오는 사건과, 돌궐에 관련된 기록도 찾아보았다.


※ 만화 장가행 長歌行 포스팅

장가행 長歌行 - 하달이 그리는 당나라 공주의 복수극
장가행 19화 ~ 24화까지 - 성 정체성에 갈등하는 이장가

장가행 21, 22화 - 이장가와 미미구리의 이별 혹은 사별
장가행 25화 - 장가의 여성성, 기대되는 약왕 손사막의 등장
장가행 26화 - 이장가 커밍아웃 & 정담진인의 가르침
장가행 27화 - 호위무사 사도랑랑의 등장
장가행 28화 - 월녀검의 계승자 & 아사나 준의 중원 데뷔

구당서 : http://zh.wikisource.org/zh-hant/舊唐書
신당서 : http://zh.wikisource.org/zh-hant/新唐書

+) 일단 자치통감부터 먼저 살펴보고, 구당서와 신당서는 나중에 찬찬히 보기로 함.


무덕 9년(626년)부터 정관 2년(628)까지의 자연재해

※ 당태종은 무덕 9년 8월 9일 (갑자일) [= 양력 9월 4일] 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고조의 연호인 무덕은
연말까지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태종 즉위 후에도 연말까지 연호는 계속 무덕을 사용하였다.

※ 날짜는 당연히 양력이 아니라 음력. 이하 자치통감 권192 당기8 의 기록.

태종 정관 원년 (627년)


6월
19 산동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조서를 내려서 있는 곳에서 진휼(賑恤) 하게 하고 금년도의 조부(租賦)를 내지 말라고 하였다.

태종 정관 2년 (628년) (태종 이세민의 나이 31세) 

3월
10 관내(關內)에 한재와 기근이 들어서 백성들은 대부분 아들을 팔아서야 의복과 먹을 것을 얻게 되었는데,
  기사일(22일)에 조서를 내려서 어부(御府)의 금백(金帛)을 내어 그들을 속면(贖免)하게 하여 부모에게 돌려보내게 하였다.
  경오일(23일)에 조서를 내려서 지난해에는 장마가 들었고 이제는 이렇게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의 재해가 있어서
  천하를 사면하였다. 조서에서는 대략 말하였다.

  "만약에 해마다 풍년이 들고 천하가 편안하여지면서 재앙이 짐(朕) 자신에게 옮겨와서 만국을 살아있게 한다면
  이는 원하는 것이며 달게 받으며 인색하지 않겠다."

  마침 그곳에 비가 내려서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4월
11 여름, 4월 기묘일(3일)에 조서를 내렸다.
  "수(隋) 말기에 혼란하고 흩어졌고 이로 인하여 기근이 들어서 해골이 드러나서 들판에 가득하며
  사람의 마음과 눈을 다치게 하였으니 의당 당지에 있는 각 관사(官司)에서 거두어 묻어주라."

6월
15 경기 안에 황충의 재해가 있었다. 신묘일(16일)에 황상이 금원(禁苑, 현무문의 북쪽에 있는 황실의 정원) 속으로
  들어가서 황충을 보자 몇 마리를 집어 들고 빌었다.

  "백성들은 곡식을 가지고 목숨을 삼는데, 네가 그것을 먹으니, 차라리 나의 폐장(肺腸)을 먹어라."

  손으로 들어서 그것을 삼키려고 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간하였다. "나쁜 물건이니 혹 병이 날 것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짐이 백성을 위해서는 재앙도 받을 것인데, 어찌 병드는 것을 피하겠소?"
  드디어 이를 삼켜 버렸다. 이 해에 황충은 재앙을 만들지 않았다.


++) 메뚜기 먹방하시는 황상 ㅠㅠ 우리 황상, 백성 생각하시는 마음이 아주 하늘 같으시네. 날 가져요 엉엉 ㅠㅠ

요약하면 627년 6월 산동지방 가뭄. 지역불명(아마도 관내도 혹은 장안 일대)에는 장마.
628년 관내에 한재와 기근. 이후에는 가뭄에 황충의 재해까지 겹쳐서 백성들이 정말 심하게 고생했는듯.
한 때는 해골이 들판에 가득했었고, 대부분 자식까지 팔아서야 의복과 먹을 것을 얻게 될 정도였다니.

여기까지가 원래 내 목적이었고, 이하는 만화 장가행 속 사건과 돌궐에 관련된 자치통감의 기록들.




연왕 나예의 반란과 최후

※ 만화에서는 영녕공주 이장가에게 연운18기를 넘겨주고 나름 멋지게 숨을 거두지만, 사서에는 그런거 없음 ㅋ

정관 원년 (627년) 1월 (자치통감 권192 당기8)

08 신축일(17일)에 천절(天節)장군인 연군왕(燕郡王) 이예(李藝)가 경주(涇州, 감숙성 경천현)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예가 처음에 조정에 들어오면서 공로를 믿고 교만하였는데, 진왕(秦王, 이세민)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군영에 가면, 이예는 아무런 연고 없이 그들을 구타하였다.
상황(上皇, 고조 이연)이 화가 나서 이예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고, 이미 그리하였다가 그를 석방하였다. 황상이 즉위하자, 이예는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았다.

  조주(曹州)에 사는 요사스러운 무당 이오계(李五戒)가 이예에게 말하였다.
  "왕에게서는 귀한 기색(氣色)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권고하였다. 이예는 거짓으로 밀칙(密勅)을 받든다고 하면서 군사를 챙겨서 조정으로
  들어온다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빈주(豳州, 섬서성 빈현)에 이르자, 빈주 치중(治中)인 조자호(趙慈皓)가
  말을 달려 나아가서 그를 배알하니, 이예가 빈주에 들어가서 점거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이부상서 장손무기 등을
  행군(行軍) 총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하였다.

  조자호는 관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통군(統軍) 양급(楊岌)과 더불어 그를 도모하려는데
  일이 누설되어 이예가 조자호를 가두었다. 양급이 성 밖에서 변고가 있는 것을 깨닫고 군사를 챙겨서 그를 공격하니,
  이예의 무리는 무너지고 처자를 버리고 장차 돌궐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오지(烏氏, 감숙성 경천현의 북쪽)에 이르렀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목을 베어 수급(首級)을 장안으로 전하였다.
  그 동생인 이수(李壽)는 이주(利州, 사천성 광원시) 도독이었다가 또 연좌되어 죽었다.




당대 장안도 (唐代長安圖) 와 당대 낙양도 (唐代洛陽圖)



장안 (=서도西都), 낙양 (=동도東都), 그리고 삭주의 위치.


당에 대한 돌궐의 노략질 기록 (626년 ~ 628년)

※ 장가행의 1화 시작시점인 현무문의 변 626년 음력 6월 4일 경신일, (= 양력 7월 2일) 즉, 626년부터
현재 연재분인 26화 (627년 봄) 까지의 역사적 배경과 그 다음해까지 돌궐 관련 기록들을 자치통감에서 발췌해봤다.
주로 당에 대한 돌궐의 노략질 기록이고, 다소 긴 내용들은 일부 생략하기도 했음.

고제(高帝) 무덕(武德) 9년 (丙戌, 626년)

자치통감 권191 당기7

2월

05 정해일(28일)에 돌궐이 원주(原州, 녕하시 고원현)를 노략질하니, 절위(折威)장군 양모(楊毛)를 파견하여 이를 치게 하였다.

3월
11 신해일(23일)에 돌궐이 영주(靈州)를 노략질하였다.
14 정사일(29일)에 돌궐이 양주(凉州)를 노략질하니, 도독인 장락왕(長樂王) 이유량(李幼良)이 이를 쳐서 도망하게 하였다.

4월
16 여름, 4월 정묘일(9일)에 돌궐이 삭주(朔州, 산서성 삭주시)를 노략질하였고, 
  경오일(12일)에는 원주(原州, 연하성 고원현)를 노략질하고, 계유일(15일)에는 경주(涇州, 감숙성 경천현)를 노략질하였다.
  무인일(20일)에는 안주(安州, 치소, 호북성 안륙시) 대도독 이정(李靖)과 돌궐의 힐리 가한이 영주(靈州, 영하성 영무현)의
  협석(硤石, 녕하성 청동협시 서남쪽 광무진)에서 싸웠는데, 아침부터 시작하여 신시(申時)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이르러서야 돌궐이 마침내 물러갔다.
18 계미일(25일)에 돌궐이 서회주(西會州, 감숙성 정원현)를 노략질하였다.



현무문의 변 (6월 4일) 이후 대리시위부에 숨어들어가 이장가가 본 기록 중에서
삭주의 전황보고가 있었다. 역사상으로도 그 해 4월 삭주는 돌궐의 노략질로 피해를 입었다.

5월
21 무술일(11일)에 돌궐이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현)를 노략질하였다.
24 [병오일(19일)에] 돌궐이 난주(蘭州, 감숙성 난주시)를 노략질하였다.

6월 
29 돌궐이 농주(隴州, 섬서성 농현)를 노략질하였고, 신미일(15일)에 위주(渭州, 감숙성 농서현)를 노략질하니,
  우위(右衛)대장군 시소(柴紹)를 파견하여 그를 쳤다.

7월
34 가을, 7월 기축일(3일)에 시소(柴紹)가 돌궐을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시)에서 격파하고, 
  특륵(特勒) 한 명과 사졸의 수급(首級) 1천여 급(級)을 목 베었다.

8월
38 8월 병진일(1일)에 돌궐이 사자를 파견하여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44 기묘일(24일)에 돌궐이 나아가서 고릉(高陵, 섬서성 고릉현)을 노략질하였다.
  신사일(26일)에 경주도(涇州道) 행군(行軍) 총관인 울지경덕이 돌궐과 경양(涇陽, 섬서성 경양현)에서 싸워서 
  그들을 대파하였다. 그들의 기근(俟斤)인 아사덕오몰철(阿史德烏沒啜)을 붙잡고 목을 벤 것이 1천여 급이었다.

  계미일(28일)에 힐리 가한이 나아가서 위수(渭水)의 편교(便橋) 북쪽에 도착하였는데, (중략)
  황상이 스스로 현무문으로 나가서 고사렴과 방현령 등 여섯 명과 더불어 말을 타고 지름길로 위수(渭水)로 나아가서
  힐리 가한과 물을 사이에 두고 말하면서 약속을 어긴 것을 책망하였다.
  돌궐은 크게 놀라서 모두 말에서 내려서 늘어서서 절하였다. (중략)

  황상이 몸을 뽑아 가볍게 나왔으며, 군대의 위용이 아주 왕성하자 두려운 기색을 갖게 되었다. (중략)

  이날 힐리가 와서 화의하기를 청하여 조서를 내려서 이를 허락하였다. 황상은 그날로 궁궐로 돌아왔다.
  을유일(30일)에 또 성의 서쪽에 행차하여 백마(白馬)의 목을 베어 힐리와 더불어 편교(便橋) 위에서 맹약을 하였다.
  돌궐은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하략)


이세민과 힐리의 위수지맹 渭水之盟. 황상께서 친히 나오시니 돌궐이 지렸다고 하더라 ㅠㅠ

자치통감 권192 당기8

9월
01 9월에 돌궐의 힐리가 말 3천 필과 양 1만 마리를 바쳤는데, 황상은 받지 않고, 
  다만 조서를 내려서 잡아간 중국의 호구를 돌려보내게 하고 온언박(溫彦博)을 불러서 돌아오게 하였다. (하략)

18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려(高麗) 세 나라가 묵은 원한관계를 갖고 있어서 서로 바꾸어가며 공격하였는데,
  황상은 국자조교(國子助敎) 주자사(朱子奢)를 파견하여 가서 타일러서 지적하니,
  세 나라가 모두 표문을 올려서 사죄하였다.

※ 돌궐의 기록과는 상관없지만,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기록이 나오길래 그냥 첨부 ㅋ 중화위엄 보소 ㅋㅋ


태종(太宗) 정관(貞觀) 원년(丁亥, 627년)

※ 태종 이세민은 당 고조 무덕 9년(626년) 현무문의 변 이후 6월에 태자가 되었고, 8월에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해가 바뀌지 않으면 연호를 바꾸어 쓰지 않기 때문에 해가 바뀌고 나서야 태종 이세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

7월
21 애초에, 돌궐은 성격이 순박하고 두터워서 정치적 명령은 소박하고 간략하였다.
  힐리 가한이 화인(華人, 중국인)인 조덕언(趙德言)을 얻어서 그에게 맡겨서 채용하였다. (중략)
  힐리는 또 여러 호족을 신임하고 돌궐을 멀리하였는데, 호인(胡人)들이 탐욕스럽고 무릅쓰며 반복하는 일을 많이 하고
  군사를 해마다 움직였다. 마침 큰 눈이 내려서 깊이가 여러 자나 되니 여러 가축이 많이 죽어서
  해마다 기근이 들었고 백성들은 얼거나 굶주렸다.

  힐리는 쓸 것을 공급하지 못하였고, 여러 부(部)에서 무겁게 거두어들이니 이로 말미암아서 안팎에서는
  흩어지고 원망하고 여러 부(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배반하니 군사는 점점 약하여졌다. (하략)

12월
41 (전략) 힐리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설연타는 회흘과 발야고 등과 더불어 서로 이끌어 주면서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힐리는 그 형의 아들인 아사나욕곡(阿史那欲谷) 설(設)을 파견하여 10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 토벌하게 하니,
  회흘의 추장인 약라갈보살(藥羅葛菩薩)이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마열산(馬鬛山, 몽골 카라코룸 시의 북쪽)에서
  더불어 싸워서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아사나욕곡 설(設)은 도망하였고, 약라갈보살이 추격하여 천산(天山, 항애산)에
  도착하였는데, 그 부(部)의 무리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히니 회흘은 이로 말미암아서 크게 떨쳤다.
  설연타는 또 그들 네 설(設)을 격파하니 힐리는 통제할 수가 없었다.

  힐리가 더욱 쇠약하여져서 그 나라 사람들은 떨어지고 흩어졌다. 마침 큰 눈을 만나서 평지에 몇 자가 쌓이니
  말과 양은 대부분이 죽고 백성들은 크게 주려서 힐리는 당(唐)이 크들이 피폐한 것을 틈탈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삭주(朔州, 산서성 삭주시)의 경계로 들어가서
겉으로는 모여서 사냥을 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방비를 마련한 것이다.

  홍려경(鴻臚卿) 정원숙(鄭元璹)이 돌궐에 사자로 갔다가 돌아와서 황상에게 말하였다.

  "융적(戎狄)들이 일어나고 쇠퇴하는 것은 오로지 양(羊)과 말을 가지고 살펴보게 됩니다.
  지금 돌궐의 백성들은 주리고 가축들은 말랐으니, 이는 장차 망할 징조이며, 3년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황상이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황상에게 틈을 타서 돌궐을 공격하라고 권고하였는데,
  황상이 말하였다.

  "새롭게 다른 사람과 동맹을 맺고서 이를 배신하면 불신(不信)이고, 다른 사람의 재앙을 이롭다고 하는 것은
  불인(不仁)이며, 다른 사람이 위태로운 것을 타서 승리를 빼앗는다면 불무(不武, 용맹하지 않음)이다.
  설사 그 종족들의 부락이 모두 반란하였고 6축(畜)도 남은 것이 없다 하여도 짐은 끝내 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죄를 짓기를 기다리고, 그러한 다음에 이를 토벌할 것이다." (후략)

※ 설(設) : 돌궐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로, 장군에 해당하는 돌궐의 말이다.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戌子, 628년)

자치통감 권193 당기9

9월
04 기미일(16일)에 돌궐이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하략)

12월
14 돌궐 북방 변경에 사는 여러 성(姓)들이 대부분 힐리 가한을 배반하고 설연타(薛延陀)에게 돌아갔고,
  함께 그들의 기근(俟斤)인 을실이남(乙失夷男)을 추대하여 가한으로 삼았는데, 을심이남이 감당하지 아니하였다.
  황상은 바야흐로 힐리를 도모하려고 유격(遊擊)장군 교사망(喬師望)을 파견하여 샛길로 책서(冊書)를 싸가지고 가서
  을실이남을 진주비가(眞珠毗伽) 가한으로 삼고 고독(鼓纛)을 하사하였다.

  을실이남은 크게 기뻐하며 사자를 파견하여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고, 대사막의 울독군산(鬱督軍山, 몽고 항애산)
  아래에 아기(牙旗)를 세우니, 동쪽으로는 말갈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서돌궐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사적(沙磧, 사막지대)에 접하였으며 북쪽으로는 구륜수(俱倫水)에 이르렀고,
  회흘(廻紇, 몽고 합이화림시 서쪽), 발야고(拔野古, 내몽고 호륜호 서쪽), 아질(阿跌, 울란바토르시 서북쪽),
  동라(同羅, 몽고 북쪽), 복골(僕骨, 몽고 동쪽), 습(霫, 요하 이북)의 여러 부(部)가 모두 속하게 되었다.

※ 고독(鼓纛) : 전투할 때 사용하는 북과 깃발을 말한다.
※ 아기(牙旗) : 대장군의 깃발이다. 상아로 만들어져서 아기(牙旗) 라고 하는 것이다.


※ 현재 연재분인 장가행 26화 시점은 627년 봄, 장소는 낙양이다.

위의 자치통감 기록이 628년 마지막 기록. 힐리가한의 기세가 크게 기울어지고, 당의 반격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위수지맹 이전에는 빈번하게 돌궐의 노략질이 성행했었는데, 이세민이 즉위하고 힐리와 맹약을 맺자,
근 2년 정도 (626년 8월 30일 ~ 628년 9월까지) 돌궐의 노략질 기록이 보이질 않는다.

다만, 위에 적혀있듯이 역사상 627년 12월에 내란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진 힐리가한이 삭주의 경계로 들어가니, 
다시 삭주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때 삭주 태수의 호부를 재활용할지도 ㅋㅋ)





장가행 长歌行 14화 中


※ 특륵(特勒) : 돌궐 가한(=칸)의 아들에게 붙이는 돌궐의 작위이다. 이는 공작에 해당한다.

자치통감에는 특륵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특근(特勤)의 오기이다. (特勒 = 突厥官名“特勤”之误) (참고)
돌궐에서는 가한(=칸) 이 가장 위이고, 그 다음이 엽호 (葉護,叶护), 그 다음이 설(設,设), 그 다음이 특근(特勤)이다. 
돌궐에는 칸 아래로 전부 28개의 관직, 즉 관명이 있다고 한다. (《주서(周書)·돌궐전(突厥傳)》)

엽호 叶护 는 가한의 자제 혹은 종실 중 강자에 주어지는 지위이다.
“其官有叶护,有特勤,常以可汗子弟及宗族为之”:《구당서·돌궐전 旧唐书·突厥传》




다른 사람들이 아사나 준 (=힐리가한의 양자) 을 부를 때, 특근特勒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돌궐의 장군, 즉 군사지휘관의 경우에는 설(設,设)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 사료로 보는 돌궐의 관직

1. 《주서(周書)·돌궐전(突厥傳)》

고위 관직[大官]에는 엽호(葉護)가 있고, 그 다음에는 설(設), 그 다음에는 특근(特勤), 그 다음에는 사리발(俟利發),
그 다음에는 토둔발(吐屯發)이 있었으며 그리고 나머지 하위 관직[小官]까지 대개 28등급인데, 모두 세습되었다.

2. 《구당서·돌궐전 旧唐书·突厥传》

[돌궐의] 가한(可汗)은 옛날 [흉노의] 선우(單于)와 같았고, 아내는 가하돈(可汗敦)이라고 불렀는데
옛날 연지(閼氏, 흉노 군주의 비 혹은 첩)와 같았다. 그 아들과 동생을 특근(特勤)이라고 불렀고,
다른 부락[別部]에서 군대를 부리는 사람을 설(設)이라고 하며 그 [아래의] 고위 관직[大官]은 굴률철(屈律啜),
다음엔 아파(阿波), 다음엔 힐리발(詰利發), 다음엔 토둔(土屯), 다음엔 사근(俟斤) [등]이었는데,
모두 그 관직을 대대로 세습해 정해진 숫자가 없었고, 아비와 형이 죽으면 아들이나 동생이 [지위를] 이어받았다.

한줄요약

1. 가한(可汗) > 엽호(葉護) > 설(設) > 특근(特勤) > 사리발(俟利發) > 토둔발(吐屯發) > 나머지
2. 가한(可汗) > 설(設) > 굴률철(屈律啜) > 아파(阿波) > 힐리발(詰利發) > 토둔(土屯) > 사근(俟斤) > 나머지

- 엽호(葉護) : 고대 투르크어로 '야브구(yabghu)' 의 음사 音寫 이다.   
가한의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가장 고위의 관직으로 주로 서방西方 통치자의 관칭이었다.

- 특근(特勤) : 고대 투르크어로 '테긴(tegin 또는 tigin)' 의 음사이다. 주로 종실宗室 의 자제子弟들에게만 부여된 관칭이었다. 

- 설(設) : 고대 투르크어로 '샤드(shad)' 의 음사로 察, 殺, 煞, 失 등으로 다르게 음사된다.
주로 군정대권軍政大權 을 장악하고 있는 지위였다. 이들은 고위 관리로서 가한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통치했던 군사령관 軍司令官 내지는 부족장 部族長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가한의 종실들이 주로 이 지위를 차지했다. 

- 굴률철(屈律啜) : 고대 투르크어로 '퀼뤽 초르(külüg chor)'의 음사이다. 초르는 '이르킨(irkin)' 과 마찬가지로 
씨족장 정도의 위상을 갖거나 아니면 장군을 지칭하는 관칭으로 퀼뤽은 '힘에 센' 이라는 형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둘이 합쳐져서 하나의 관칭이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일반적인 관칭의 용례는 아니다.

- 아파(阿波) : 고대 투르크어로 '아파(apa)' 의 음사이다. 이것은 단독으로 쓰이는 관칭이라기보다는
타르칸과 합쳐 군대를 총괄하는 사령관의 의미로 '아파 타르칸(Apa tarqan)'의 용례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사리발(俟利發), 힐리발(詰利發) : 고대 투르크어로 '일테베르(ilteber 또는 elteber)' 의 음사이다. 
유연柔然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그 지위는 부족장 정도였다. 

- 토둔발(吐屯發) : 고대 투르크어로 '토둔바르(todunbar)'의 음사이다. 다르게 줄여서 '토둔(土屯, todun)' 이라고 
하는데, 이는 주로 피정복 대상 부락에 파견해 징세徵稅 하거나 간접 통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사근(俟斤) : 고대 투르크어로 '이르킨(irkin)'의 음사이다. 일반적으로 씨족장氏族長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부락의 수령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관명으로도 사용되었다. 대개 작은 종족 단위의 추장의 명칭 씨족장 정도로 번역된다.







두소년 (阿竇,아두) 의 정체에 대한 썰

장가행 1권에서 지금에 이르는 5권까지 중에서 가장 먼저 주인공인 이장가에 동조해서 이세민을 죽이는 일에
함께 하게 해달라고 한 두소년 竇少年, (원본인 중국어판에서는 아두 阿窦) 이 묘하게 신경쓰였다.

수말당초에 두竇 씨하면 누가 있었지하고 생각했는데, 하왕 두건덕(夏王 竇建德)이 있었음 ㅋㅋ
만화 장가행의 중국독자들도 아두의 정체는 두건덕의 아들 혹은 손자가 아니겠느냐하고 추측하고 있더라.


  

두건덕 (竇建德, Dou Jiande, 573년 ~ 621년)  - 수말동란을 대표하는 농민군웅

패주 장남 (貝州 漳南, 산동성 평원현)의 농민. 의리가 있고 정의감이 있어, 이장(里長, 100호의 장)이 되었다.
고구려 원정시, 관료로부터 도둑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의심을 받아, 도둑 고사달 아래로 도망치게 된다.
고사달의 사망 이후 두건덕은 관용과 의리가 두터운 인품으로 인해 급속히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

617년 스스로 장락왕(長樂王)이라고 칭하며, 618년에는 하북, 산동을 기반으로 하나라(夏國)를 세운다.
이후 수년간, 하나라 안은 밤에 문단속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잘 다스려졌고, 수말군웅의 중심에도 섰었다.

621년 당의 이세민(훗날의 당 태종)이 지금의 하남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정나라 황제 왕세충을 공격했을 때,
그는 당이 정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면 자신의 하나라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아내 조씨(曹氏)와 모사 능경(凌敬)의 충고를 물리치고 왕세충을 구원하러 나섰다가,
결국 호뢰관(호로관) 전투에서 이세민에게 패하여 사로잡힌다. 이후 고조의 명으로 장안에서 처형당한다.



이세민은 왕세충과의 전투에서 두건덕이 원군으로 참여하자, 호뢰관을 점거하고 공격의 주도권을 쥐고,
두건덕의 대군이 서진하는 것을 막아선다. 이렇게 나오자 두건덕의 모사 능경이 제안을 한다.

두건덕의 모사 능경 凌敬 (하의 국자좨주)의 제안.

"대왕께서 모든 군사를 다 데리고 황하를 건너며 하남을 공격하여 뺐고, 이를 중요한 장수로 하여 지키게 하고,
하북으로 북상해서 당의 산서를 경락하고 나아가면 3가지의 이로움이 있습니다."

1. 아무도 없는 땅을 밟는 것이라 승리를 거두는데 만전을 기할 수 있다.
2. 땅을 개척하고 무리를 거둬서 하나라의 형세를 더욱 강하게 할 수 있다.
3. 이렇게 하면 관중이 놀라서 당은 스스로 정나라 낙양 포위를 풀게 될 것이다.

두건덕은 능경의 말을 따르려고 했는데, 왕세충이 계속 낙양을 구원해 달라고 사자를 급파하고,
왕세충의 부하들은 두건덕의 제장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금과 옥으로 매수해서 능경의 계획을 얽어맨다.

결국 중론이 엉뚱하게 돌아가고, 왕세충의 사신들이 애끓게 하소연하자 의리가 두터웠던 두건덕은
눈앞에서 애타게 구원을 바라는 정나라를 버리지 못하고, 모사와 아내의 충고를 뿌리치고 구원하러 갔다가

한방에 인생 패망 ㅋㅋㅋ

두건덕은 이세민 못지않은 영웅호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왕의 자질보다는 협객의 자질이 짙었다.

두건덕이 장안에 압송되었을 때 신속하게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젊어서부터 의협심이 뛰어나 가난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왔으며, 한 지방의 패자覇者가 되어서도
사치와 호의호식을 멀리하고 오로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산동과 하북 민중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당의 입장에서는 백성들의 지지가 높은 두건덕을 살려두는것은 너무 위험하다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두건덕과 얽기에 문제는 사료에 두건덕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 
대신 두건덕의 양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온다. "자치통감 권189 당기5 고제 무덕 4년(621년)" 의 기록에

  두건덕이 사로잡히고 두건덕의 처인 조씨와 좌복야 제선행이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숨어서
  명주(洺州, 하왕 두건덕의 도읍지)로 돌아갔다.

  5월 임신일(15일)에 제선행이 명주(하의 도읍지), 상주(相州), 위주(魏州) 등의 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 때 두건덕의 남은 무리들은 달아나서 명주에 도착하여 두건덕의 양자를 세워서 주군으로 삼고,
  병사를 징발하여 당을 막으려고 하였고, (후략)

라고 적혀져 있다.


曹皇后 - 隋末农民起义领袖、夏王窦建德的皇后
조황후 - 수나라 말, 농민봉기 지도자. 하왕 두건덕의 황후

李世民将窦建德、王世充押回长安,唐高祖李渊处死了窦建德。
夏国欲立窦建德的养子为王(这暗示窦建德没有儿子)
齐善行认为大势已去,遣散士卒,和曹皇后、右仆射裴矩、曹皇后的哥哥行台曹旦,
以河北山东之地,奉传国等八玺降唐。之后,史书没有关于曹皇后的记载。
(清朝小说《隋唐演义》称曹皇后出家为尼,但史书并没有记载。)

이세민은 두건덕을 물리치고, 왕세충을 장안으로 압송. 당고조 이연은 두건덕을 죽인다.
하나라는 두건덕의 양자를 왕으로 삼아 계속 이어가려 했으나, (이는 두건덕에게 아들이 없었음을 암시한다)
제선행 齐善行 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해, 병사를 해산시키고, 조황후를 달래어,
우복야 배구 裴矩, 조황후의 오빠 형대 조담 曹旦과 함께 하북 산동의 땅과, 여덟개의 옥새를 바치며 당에 항복한다.
이후, 사서에 조황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청나라 소설 《수당연의 隋唐演义》는 조황후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나 사서에 그러한 기록은 없다.)


++) 위에 적어놓은대로 양자는 있었지만, 진짜 아들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뭐, 주인공인 이장가도 허구인물인데, 두소년이라고 못할거 있나 ㅋㅋ 왠지 두건덕 아들 혹은 손자일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만, 아들이냐 손자이냐에서 갈릴 것 같은데, 실제로 두건덕은 당 고조 이연과 얼추 비슷한 나이였으니, 

이연 (566年1月13日—635年)
두건덕 (573年----621年8月2日)
이세민 (599年-649年)

때문에 아들보다는 손자라는 설정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친척이라든가.
현재 두소년의 나이는 12세→13세. (참고로 이장가는 14세→15세, 아사나 준은 18세→19세.)

나이에 관해서는 이장가와 두소년이 2살 차이나는 것은 확실함. 그리고 이장가는 14세. (원서 11화에서 확인가능)
진노인 역시 11화에서 공주는 아직 15세도 안 되었다고 말하면서, 두소년과는 2살 차이가 난다고 언급했다.


※ 일본어판 장가행 4권은 2013년 11월 19일 발매예정이던데, 아마도 24화까지 수록되지 않을까 싶다.
24화 끝이 장가가 성 정체성 갈등을 겪는 장면이기 때문에 끊기도 좋다. 그나저나 표지 메인이 누굴지 개궁금함.

벌써 1~3권까지 이장가, 아사나준, 미미구리 다 나왔음. 근데 4권 분량에서 피크는 미미구리와의 사별이잖아.
그럼 3권에 이어 4권까지도 표지 메인은 미미구리가 되려나? ㅋㅋ

그냥 자연재해만 좀 살펴보려고 자치통감 펼쳤는데 ㅋㅋ 어쨌든 궁금한거 해결하니 속은 시원하다.


덧글

  • 한자 2013/10/06 15:02 # 삭제 답글

    와 한자를 하나하나 쓰신건가요? 저도 역사는 좋아하지만 와 이렇게 세세하게 한진 못하는데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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