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우의 성 - 전국시대 중간관리직 미츠나리의 비극 영상문화생활

 


최근에 영화 노보우의 성을 재밌게 봤다.
영화는 진지한 전쟁 영화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물이기에 그저 재밌게 보기만 하면 되는데,

은근 이런 영화들은 보면 바탕이 된 실제 전투는 어떠했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라서 다소 살펴보았다.

작중에서 그려지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모습은 그저 빗츄 타카마츠성을 수공으로 함락시킨 히데요시를 동경해
오시 성을 수공으로써 함락시키려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결과는 누구나 알다시피 그냥 대실패로 끝난다.

미츠나리 넌 그냥 빗츄에서 보았던 히데요시의 모습을 따라하며 "결괴해라 決壞させよ" 를 외치고 싶었던 것뿐이냐 ㅋㅋ

그냥 수공만이 실패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았을 텐데, 본성인 오다와라 성이 함락된 후까지 오시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오다와라에서 히데요시에게 귀순한 성주・나리타 우지나가의 권고에 의해, 저 1개월 이상의 농성은 그 끝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으아앙 미츠나리 ㅠㅠ

심지어 저 오시 성 전투는 미츠나리가 대군을 이끌고 처음으로 임한 전투였기에 더욱 안습하다.




그리고 영화 끝에서 오시 성 개성 이후, 적의 총대장인 나리타 나가치카에게 항복 조건을 일러 준 뒤 돌아가는
이시다 미츠나리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에게는 군략의 재능이 없다" 고 스스로 인정하고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미츠나리 : 나에게는 군략의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하하하.

  요시츠구 : 그렇다면 앞으로 이재(理財)를 활용해서 살텐가

  미츠나리 : 아니, 언젠가 내 영지의 반을 써서라도 천하제일의 무사를 가신으로 맞이하여
       천하제일의 큰 전쟁을 지휘해 보이겠네. 하하하하.

  나레이션 : 이시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세키가하라의
       대전을 획책하지만 패주. 오우미에서 붙잡혀 쿄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

나레이션 ㅋㅋㅋ 저런건 넘어가주면 안 되냐 ㅋㅋ 초전에서도 망했는데, 굳이 세키가하라까지 이야기 할 필요는 없잖아.

대군을 지휘해 임한 첫 전투인 오시 성 공략에서는 수공 실패에 이어, 본성이 함락되었는데도, 지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굴욕.
그리고 결국 자신의 마지막 전투가 된 세키가하라에서는 불과 하루 만에 천하의 주인이 결정 나버리는 결과를 맞이함 ㅠㅠ

히데요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였을텐데, 미츠나리는 왜 저런 식으로 행동했는가.
작중에서 그려지는 미츠나리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를 위한 변명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래의 글을 준비했다.











수공으로 혼마루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물에 잠긴 오시 성을 둘러싸고 있는 이시다 제방.

忍城攻め-戦国の中間管理職 ・三成の悲劇
http://www.asahi-net.or.jp/~ia7s-nki/knsh/oshi.htm


일본 3대 수공 (日本三大水攻め)


1. 빗츄 타카마츠성 수공 (備中 高松城の水攻め) (텐쇼 10년, 1582년 4월 ~ 6월 4일)
2. 기이 오오타성 수공 (紀伊 太田城の水攻め) (텐쇼 13년, 1585년 3월 24일 ~ 4월 22일)
3. 무사시 오시성 수공 (武蔵 忍城の水攻め) (텐쇼 18년, 1590년 6월 5일 ~ 7월 17일)

일본 공성전 역사에 남은 3대 수공전 水攻め 은 전부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의 작품. 돈 지랄 작전.

오시 성 전투 (忍城の戦い#2

1590년 (텐쇼 天正 18년) 6월 5일부터 7월 17일까지 계속되었다. (7월 16일 오다와라 개성.)

1. 오시 성 공격군의 편성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 1,500人
아사노 나가마사 (浅野長政) 3,000人
사나다 마사유키 (真田昌幸) 3,000人

2. 오시 성 수비군 (忍城守備軍)(나리타 우지나가의 부하들)

오시 성 전투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대장, 나츠카 마사이에를 부장으로 사타케 요시시게, 우츠노미야 쿠니츠나,
유키 하루토모 등의 히타치, 시모츠케, 시모우사의 여러 다이묘들과 사나다 마사유키 등의 코우즈케의 제장을 선봉으로,
본진은 가까운 곳에서 오시 성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마루하카야마 고분에 두고 오시 성을 포위하였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에게 가까이에 흐르고 있는 도네가와(利根川)를 이용한 수공을 명령하였고,
아사노 나가마사와  이와츠키 성(岩槻城)에 있던 도쿠가와 세력의 후방부대까지 투입하여,
도네가와에서 오시 성 가까이까지 이시다 제방의건조를 진행하였지만, 도네가와의 수량이 빈약하여 수공의 효과는 옅었다.
그 뒤, 물을 더 끌어모으는 가운데 제방이 터지고, 이시다 측에서 익사자가 나오는 등 수공은 실패로 끝난다.
오시 성 전투는 7월이 되었음에도 계속 되었다. 

최종적으로 오시 성은 함락되지 않고, 본성인 오다와라 성이 개성함에 따라 오시 성 역시 문을 열게 된다.

영화에서도 그랬지만 오시 성 전투에 참가한 이시다 군의 총병력은 2만 혹은 23,000 기로 그려지는데,
일본 위키의 항목에는 위와 같은 병력 구성으로 항목이 작성되어 있더라. 출처가 있던데 아래의 책이 그 출처이다.
이에 오시 성 수비군은 나리타 나가치카를 죠다이로서 500기와 가신, 무장한 농민까지 포함해서 합계 3000명.

参考文献 : 矢部健太郎「秀吉の小田原出兵と「清華成」大名」2011年 (『國學院大学紀要 第49巻』)


오시 성 CG 재현도 - 최초의 공격을「나리타기 成田記」의 기술대로 그린 것.


텐쇼 연간 (1573~1592) 의 오시 성 평면도. 연못 중간에 섬이 있고, 중심부에 혼마루가 있다


이시다 제방 ・ 완성시의 오시 성의 수위도(水位図)

짙은 갈색의 선이 제방이고, 좌상의 화살표가 끌어 들여온 물의 흐름.
빨간 삼각형은 군사의 배치를 나타낸다. 제방의 총 길이는 28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오시 성의 복원 모형. 교다시 향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방 붕괴(決壞) 상상 CG 재현도

사료에 따라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도 있고, 그 원인에 대해서도 폭우・사람의 손에 의한 파괴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격류가 수백명을 익사시켰다고 적혀있는 기록도 있다. 


오시 성 공략 - 전국시대 중간 관리직 ・ 미츠나리의 비극

忍城攻め-戦国の中間管理職・三成の悲劇 (*秋田書店「歴史と旅」99年4月号 特集「石田三成の真実」所収.)
編集部校正前の初稿につき雑誌掲載分と一部異なっています。


1. 미츠나리에게 있어 오시 성 공격

오시 성 공격은, 미츠나리의 무장으로서의 전력 중에서도 특필할만한 것이다.

그 이유는 2가지 존재한다.

첫째, 이는 미츠나리가 일군의 대장으로서 임한 첫 전투이며, 두번째, 진위에 대해서는 이후에 논하겠지만,
이 전투가 미츠나리의 무장으로서의 능력부족, 흔히「전쟁 하수」라는 점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미츠나리의 오시 성 공격은, 도대체 어떠한 전투였으며, 이는 정말로 미츠나리에게 무장낙제의 낙인을 찍은 전투였을까.
이시다 미츠나리의 오시 성 공격을 둘러싼 진상을, 이 자리에서 검증해 보려고 한다.


2. 통설로서의 오시 성 공격

미츠나리의 오시 성 공격은, 텐쇼 18년 (1590년) 6월,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성 공격과 시기를 같이 하여 행해졌다.
이 때,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고 오다와라 성을 포위했는데, 이와 동시에 별동대를 이용해 호죠 측의 관동 제성들을 공략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부대의 대장을 미츠나리로 임명했다. 미츠나리가 이끈 것은 맹우・오오타니 요시츠구, 나츠카 마사이에
이외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타가야 시게츠네(多賀谷重経), 호죠 우지카츠(北条氏勝),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도고쿠의 큰 다이묘들로 총합 2만 3천여명에 이르는 대군이였다.

당시의 미츠나리의 신분이나 다른 별동대의 대장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이는 대발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군을 이끈 미츠나리는, 먼저 다테바야시 성(館林城)으로 향하고 이를 항복, 성문을 열게 만든다.
그리고 다음에 향한 곳이 오시 성(忍城)이다.
오시 성은 관동 7대 명성이라고 꼽힐 정도로 이름 있는 성이며, 성은 주위에 늪지・저습지들이 둘러져 있어,
대군을 이끌고는 쉽게 접근할 수 없기에, 성의 공격은 어려움의 끝에 다다랐다.

미츠나리의 오시 성 공격에 대한 상황은,「関八州古戦録」「成田記」등, 에도시기에 성립된 수많은 군기물에 기록되어 있다.
군기물(軍記物)의 기록에 따른「통설」로서의 오시 성 공격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는 다음과 같은 형상이였다.

성 공격이 잘 진행되지 않자, 미츠나리는 가까운 작은 산 (마루하카 산,丸墓山) 에 올라 주위의 지형을 살펴보고,
히데요시의 빗츄 타카마츠 성 공격을 떠올려, 오시 성을 수공으로 공략하기로 한다.
곧장, 미츠나리는 가까운 마을에서 10만의 인부를 모아, 오시 성을 둘러싸는 제방을 만들고 성을 수몰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계산에 능한 미츠나리였기에, 제방은 불과 5일만에 완성되고, 성의 주위에는 물이 차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폭우가 내려 제방이 터지고, 격류는 성이 아니라 가까운 미츠나리 쪽으로 흘러오고, 수공은 실패로 끝난다.
오시 성의 물이 빠진 이후에는 주위에 이전보다 더 많은 진흙탕이 생겨서 도저히 성 공격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였다고. 전해졌다.

오시 성은, 결국 계속되는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고, 오다와라에서 히데요시에게 귀순한
성주・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의 권고에 의해, 1개월 이상의 농성은 그 끝을 맞이하고, 드디어 성문을 열게 된다.

수비측의 10배에 가까운 대군으로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으로 인해, 오시 성 공격은 미츠나리에게 있어 무장으로서의 능력결여를 나타내는 예로서 종종 언급된다.


3. 수공에 적합하지 않은 오시 성

군기물에서 오시 성 공격을 살펴보면, 미츠나리의 실수와 서투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에도시기에 만들어진 미츠나리의 우화는 대부분이 미츠나리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한 것이였기에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다.

때문에 오시 성 공격과 동시대에 작성된 사료나,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는 유구(遺構) 등의 물증으로 부터
당시 오시 성 공격의 진실을 살펴볼 수는 없을까.

현재 오시성터는, 사이타마 현 교다시의 향토박물관이 되어있다.
주위의 저습지는 완전히 메워져 있고,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보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미츠나리가 본진을 두었다는 마루하카 산에서 오시성을 살펴보면, 수공을 펼치기엔 상당히 곤란한 지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시 성은 주변이 모두 평탄지이며, 주위에는 구릉, 혹은 자연제방에 해당하는 지형이 없다.

또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오시 성의 혼마루 부근은 미츠나리가 제방을 쌓은 곳에 비해, 지형적으로 다소 고지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성을 완전히 수몰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큰 대규모의 제방을 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시 성은 "떠있는 성(浮き城)" 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별명처럼, 오시 성은 수몰시키기 매우 곤란한 성임을 알 수 있다.


4. 난항을 겪는 수공(水攻め)

오시 성에의 수공은 난항을 겪었다. 통설에 의하면, 미츠나리는 불과 5일만에 완성시켰다고 하지만,
당시의 서장(書状)으로부터 수공 개시의 1개월 후, 개성 직전의 시점까지도, 제방공사가 이루어졌음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 미츠나리는, 오시 성을 수공으로 함락시키는 일이 곤란하는 것을 사실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실은, 수공 개시 직후의 6월 12일자 편지에서, 미츠나리의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忍之城之儀、御手筋を以て、大方相済に付けど、(中略)然る処、諸勢水攻之用意候て押寄る儀これ無く」
(오시성 공격에 대해서 대부분의 준비는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은 수공으로 결정됨에 전혀 공격하려 들지 않습니다.)

수공이라고 확신하고 소극적인 여러 장수들의 모습에 한탄하는 미츠나리.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수공에 비판적인 미츠나리의 모습이다. 대장인 미츠나리 자신이 수공에 비판적이였다면 수공을 명령한 것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5. 수공(水攻め)을 고집하는 히데요시

한편, 그 시기의 히데요시의 편지를 살펴보면, 히데요시가 실로 세세한 부분까지 수공의 지시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공이 시작된 것은 6월 10일 이지만, 12일 자의 편지를 보면,
이미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에게 수공의 방법, 전후처리 등에 대해서 세세한 지시를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20일 자의 편지에는 미츠나리에게 수공의 평면도를 제출하라 했고,

「제방을 쌓는것이 진행됨에 따라 사자를 보내서 자신의 승인을 받도록
(普請大形でき候はば、御使者を遣わされ、手前に見させらるべく候の条)」 이라고 적혀져 있다.

오시 성을 수공으로 함락시키는 것에 고집하는 히데요시의 모습은, 7월 3일 아사노 나가요시 (浅野長吉, 아사노 나가마사) 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때, 아사노 나가요시가 오시 성에서 무공을 올린 것을 칭찬하며,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오시 성 공격에 있어, 수급 30급을 올린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오시 성은 수공으로 한다. 이를 다시금 명령한다.
(とかく水責仰せ付けらる事候間、其の段申し付くべく候也)。)」

이러한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오시 성을 수공으로 공략한다는 방침은 미츠나리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히데요시의 지시였다.

수공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걸리는 전법이며, 게다가 성 뿐만이 아니라 부근의 전답까지도 수몰시켜,
모조리 황폐화시켜 버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수공이란 주변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위험한 전술이기도 하다.

당시 일개 부교에 지나지 않았던 미츠나리의 독단으로, 이러한 수공은 성립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한편, 수공이라는 전술은 히데요시가 자신의 재산과 힘을 관동의 신참 장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절호의 방법이였다.
히데요시는 편지에서 "제장들을 데리고 수공을 보러 가겠다" (「水責めの体、御見物なさるべく候条」), 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공격에 있어서도 일부러 이시가키 산에 하룻밤 성을 세우는 연출로, 여러 장수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처럼 오시 성에서는 주변 일대를 호수로 만드는 수공으로, 도고쿠 제장들은 상상도 못할 공성전을 연출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히데요시에게 있어 오시 성 공략은 그저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공이라는 히데요시의 재력이 없으면 행하지 못할
공성계략을 실행함으로써, 이러한 방식을 신참 제장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큰 목적이였다. 그리고 계산에 뛰어난 미츠나리를
대장으로 발탁한 것 자체가, 이미 오시 성을 수공으로 함락시키려는 것을 전제로 한 인사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6. 전국시대 중간관리직의 비극

오시 성은 수공으로 공략하기 곤란한 성이였으며, 미츠나리는 이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츠나리는 수공을 고집하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대제방을 만들고, 수공을 감행했다. 그 제방의 총 길이는 28km에 달했다.

이는 빗츄 타카마츠 성 수공전에 만들었던 제방의 4배에 해당하는 길이로, 오시 성의 공격은 수공으로서는
전국시대 전쟁 역사상 최대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런 대제방으로도, 물 위에 뜬 성이라고 불리는 오시 성의 수몰은 힘들었다.

현장을 살펴보지 않고 내린 상사의 무리한 명령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모습,
그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현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중간관리직의 비극을 그에게서 엿볼 수 있다.

오시 성 공격에 있어 미츠나리의 수완은 확실히 좋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의 행동엔 충분히 동정의 여지가 있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게 명령받은 조건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오시 성 공격에 관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오시성 공략에 있어 미츠나리의 지휘 하에서 같이 싸웠던 장수들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오오타니 요시츠구, 나츠카 마사이에, 사타케 요시노부, 타가야 시게츠네, 사나다 마사유키 등 인데,
이들 무장은 훗날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대부분이 미츠나리의 편, 혹은 미츠나리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하는 대전에서, 그들이 자신의 운명을 미츠나리에게 맡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시 성 전투를 가까이서 바라본 그들은「전쟁 하수」라는 통설의 이미지와는 다른 미츠나리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노보우의 성 (のぼうの城)』 도요토미 군 (특별영상) : 야마다 타카유키 인터뷰 ㅋㅋ






2011년 일본 대지진 쓰나미를 연상케 하는 영화 속 오시 성 수공 장면.

영화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는 TBS 개국 60주년 기념 작품이다.

노보우의 성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 와 동시상영된『거신병 도쿄에 나타나다』의 히구치 신지(樋口真嗣) 감독과
국내에는 영화『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잘 알려진 이누도 잇신(犬童一心) 감독이 공동 감독을 맡아서 제작하였다.

원작은 와다 료의 역사소설인데, 소설 자체가 원래 영화를 전제로 쓴 각본을 노벨라이즈 해서 집필한 작품.
대개 원작 작품을 영상화 할 경우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이건 아예 영화화를 전제로 쓴 소설인데다가,
이 영화에 원작자 와다 료가 각본으로 참가했다.

그러니까 각본 소설 영화로 이어진 노보우의 성은 영화가 완성판이라고 봐도 된다.

다만, 결국 수공 장면에서 물로 인해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는 직접적 묘사 장면은 수정하고 개봉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원래 영화는 원래 2011년에 개봉하려고 했는데 당해 3월에 일본 대지진 크리 먹음.
근데 웃긴건 영화 내용자체에 수공 水攻め 이 포함되어 있고, 심지어 첫 장면부터 히데요시의 빗츄 타카마츠 수공 돋음.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수공 장면은 거의 쓰나미 때문에 엄청 사람 죽어나간 동일본 대진재 쓰나미와 거의 판박이.
진짜 이 영화 개봉 시기 안 미루고, 11년에 그대로 개봉했었으면 감독 & TBS 돌 맞았을듯.ㅋㅋㅋ

결국, 2011년 9월 17일에 공개예정이였던 이 영화는 문제의 장면을 수정하고 2012년 11월 2일 개봉하게 됨.
2010년 여름에 촬영을 시작했는데 영화 속의 장면이, 반년 후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으니 소름 돋았을듯.

또, 역사적 이야기 중에서, 오시 성 농성전에서 나리타 우지나가의 딸인 카이히메가 활약,
포위군을 물리쳤다는 전승이 있는데, 이는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카이히메가 농성군을 지휘해서 활약했다는 설화는 후세에 편찬된 『나리타 기(成田記)』와『진서태합기(真書太閤記)』를 통해
전해졌는데, 2013년 현재 확인 가능한 것은 그녀가 히데요시의 측실 중에 한 명이였으며, 죽기 전까지 그랬었다는 것 뿐.

영화에서는 카이히메가 남자도 못 당하는 여장부라는 것까지만 묘사되지, 오시 성 전투에서 직접 활약하지는 않는다.  


영화 스토리 상으로 성주 나리타 우지나가는 이미 히데요시와 내통하고 있어, 
오시 성 전투는 전혀 일어날 필요도 없는 싸움이였는데, 노보우 (나리타 나가치카)의 변심으로 인해서 개전.

결국 수공으로 애꿎은 백성들만 숱하게 죽어나간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내부의 불만을 적에게 돌리기 위해서 나가치카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인심을 이용하는데,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악인이나 다름 없음. 그게 악의든 선의든 그냥 멍청한 백성들만 죽어라 이용당하더라.

<꽃의 케이지>에서 마에다 케이지는 武의 가부키모노로 그려지는데, <노보우의 성>의 나리타 나가치카는 그야말로 知의 가부키모노.

비록 본성인 오다와라 성 함락까지 버텨냈던 유일한 지성이였기에 나리타 家의 주가는 상승, 체면 또한 살았지만,
정말 애꿎은 백성들과 군사들만 숱하게 죽어 나갔다. 미츠나리는 전쟁 하수라는 타이틀만 얻었지 ㅠㅠ 

오시 성, 물 바다 위에서 벌어진 난장판 같은 전쟁.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었던 이 전투는 누구를 위한 전투였을까.


덧글

  • 박꿈 2013/05/10 17:15 # 답글

    책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시다 제방이 어떤 모습일 지 궁금했는데, 이미지를 보니 감이 옵니다. 전투가 아니라 거의 토목공사 수준^^;
  • 함부르거 2013/05/10 22:08 # 답글

    지형이 저렇게 복잡하고 물길이 많은데... 미츠나리가 아니라 히데요시 본인이 왔어도 수공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 슈가수박 2015/03/15 17:56 # 삭제 답글

    세키가하라는 하루 만에 끝난게 아닙니다.
    겨우 3시간만에 끝난 전투입니다.
    3시간만에 일본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주변의 백성들이 도시락을 먹으면서 구경하다고 너무 빨리 끝나서 짜증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 깜둥이 2018/02/20 23:02 # 삭제 답글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paro1923 2018/09/24 22:07 # 삭제 답글

    우연히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흥미가 생겨, 원작 소설가의 다른 작품 '무라카미 해적의 딸'도 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코믹스판)
  • 여기서도군쟁 2021/04/26 17:39 # 삭제 답글

    오시성 전투 이 전투 이후 무능한 군재를 임진왜란에서 보여준 이시다 미츠나리 도노. 세키가하라 이야기는 나오지만 1592년은 일본이 패배한 전쟁이라 군사 칸베에나 나오게 된다. 그것도 처침하게 평양성에서 어떻게 되었소 고니시 공? 개전할 때는 16000명이 있었으나 돌아올 때는 절반으로... 물론 행주산성 전투는 안나온다. 일본이 제작비를 임진왜란에 투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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